Pain Of Salvation –
Remedy Lane (2002) |
100/100 Nov 25, 2025 |

I am the unclean
자신이 더럽혀진 존재임을 선언으로 전작 The Perfect Element Pt. 1 (2000)은 시작합니다. 본작 Remedy Lane (2002)의 정서와 주제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여전히 불안정하고 결핍된, unclean한 존재를 노래합니다. 왜 20년 전, 20살의 청춘은 Remedy Lane을 사랑했을까요?
음악적으로 작곡과 연주의 요소 요소가 다른 앨범에서 유래없을 정도로 창의적이고 유려하며 흘러 넘칩니다. 곡의 구조와 박자가 개별적으로는 복잡하고 예측치 못할 정도로 변화무쌍하지만, 더 큰 규모에서 규칙성을 형성합니다. 절정에 도달한 천재의 재능과 에너지를 접했을 때의 그 절대적 압도감은 비교불가능한 미학을 발생시킵 니다. 그 결과 음악적 도파민이 격렬하게 흘러 넘쳐 이제는 과거의 평범한 음악에는 만족을 못 느끼는 귀가 되어버렸어~!! 가히 Remedy Lane의 짜릿함은 "섹스다 섹스"입니다.
그러나 Remedy Lane의 강렬함은 음악적 자극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Remedy Lane이 특유의 어둡고, 무겁고, 그렇지만 동시에 인간적 따뜻함이 청춘의 어둠을 깊고 강하게 파고들었습니다. 저는 10살 때 12살의 누나와 관계를 맺지도, 누군가의 "Rope Ends"를 목격하지도, 부다페스트에서 선을 넘는 행위(Beyond the Pale)를 한 적도 없습니다. 지극히 평범한 삶이지만, 어느 순간 성장을 하는 과정에서 결핍과 자기 부정, 고독이 생겼습니다. 그것의 원인을 대한민국 입시 경쟁의 병폐와 사회의 불안정성에서 찾을 수도 있지만, 20년이 지나고 나니 무책임한 수사이지만 "아프니까 청춘이다"와 같이 청춘이 겪는 보편적인 성장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앨범의 해설서나 청자들의 리뷰, D. Gildenlow의 인터뷰 등에서 본 앨범의 주제는 자전적인 성격이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든 이전작인 Perfect Element Pt. 1과 Remedy Lane은 Pain of Salvation의 정점을 장식한 듀올로지(이부작)로 정서와 주제, 작곡 방식이 거의 유사합니다. 다만 Perfect Element Pt. 1은 3인칭(He and she)의 시점의 완결성을 갖춘 이야기라면, Remedy Lane은 1인칭의 입장에서 보다 D. Gildenlow 개인의 불완전한 이야기에 가깝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unclean한 남성과 여성이 부다페스트를 배경으로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고, 결핍을 섹슈얼리티로 매우려 하지만 충족되지는 않으며, 인간성을 회복하려는 희망을 놓지 않으려는 메인 주제가 오프닝 트랙 Of Two Beginning 부터 최종 트랙 Beyond the Pale까지 앨범의 중심축을 이룹니다. 그 중간 중간, 메인 주제와는 다소 독립적인 사건을 다루는 일련의 곡들 – 예를 들어 A Trace of Blood, Second Love 등 – 이 교차하며, 마치 텐션음(비화성음)처럼 긴장감과 입체감을 불러일으킵니다.
Remedy Lane 가사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그것이 과거에는 제 영어 실력이 부족해서인 줄 알았더니, 오늘날 AI의 번역을 이용해도 그 이야기가 명확하지 않으며, 원어민들 또한 가사의 의미 해석에 어려움을 토로합니다. 즉 Remedy Lane은 애초에 불친절한 이야기입니다. 굳이 그 이야기를 하나하나 이해하려 하기 보다는, 그 순간 순간 노래의 언어(가사), 운율, 선율, 창법(두성, 샤우팅, 랩, 나레이션) 등을 매개로 발현되는 감정의 흐름에 공명하는 것이 최속의 감상법이라 생각합니다. 선언적인 가사들이 꽤나 귀에 잘 들리고 뇌를 때립니다.
예를 들어, Fandango에서 Live that you might find the answers / You can't know before you live / Love and life will give you chances / From your flaws learn to forgive 혹은 Beyond the Pale에서 We will always be so much more human than we wish to be... 와 같은
술마시며 이야기하다보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이해와 오해가 교차하지만 마음이 통할 때가 있잖아요. Remedy Lane에서 D. Gildenlow가 정확히 무엇을 노래하는지 모르겠지만, 굳이 그의 자전적인 이야기 혹은 감정의 배설을 하나하나 따라갈 필요도 없지만, 그래도 그 느낌은 알 것 같습니다. 우리가 가진 근원적 결핍과 그로 인한 어둠을 고해하고 그것에서 회복을 향한 여정이 바로 치유의 길(Remedy Lane)입니다.
서울과 집을 오고 가는 지하철의 어둠 속에서, 그리고 고시원의 폐쇄 공간 속에서, CDP를 틀고 북클릿의 가사를 따라가며 이어폰으로 Remedy Lane 속 세계로 빠져들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이제는 가족을 꾸리고 아이를 키우고 사회인으로서 생존을 위해 살면서 Remedy Lane은 과거의 것이 되었습니다. 지하철의 어둠과 비좁음이 자차의 창밖 풍경과 쾌적함으로, 고시원의 고독이 가족과의 행복으로 바뀌었습니다. Remedy Lane을 누릴 여유조차 없는 게 어른의 삶이고, 그래도 역설적으로 과거 청춘의 Remedy Lane이 성장의 과정으로 의미 있었을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큰 Remedy Lane은 아이를 만나 아이와 같이 살아가는 시간 시간일 것입니다.
100점 만점에 125점 ... 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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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lverine –
A Darkened Sun (2021) [EP] |
95/100 Mar 26, 2025 |

스웨덴의 프로그레시브메탈 밴드 Wolverine은 2020년 늦가을 A Darkend Sun이라는 제목의 Audio-Visual EP를 발표합니다. Phoenix Slain, The Breach, Dead as The Moon, Hibernator로 이어지는 28분 분량의 네 곡을, 혹은 네 챕터로 구성된 한 곡을, 서사를 가진 영상에 덧입혀 발표하였습니다. 먼저 YouTube 영상으로 EP를 발표한 후, 2021년 LP와 스트리밍 형태로 앨범을 발매하였습니다.
과거 Wolverine이 프로그레시브메탈의 신성으로 주목을 받았던 적도 한 때 있었습니다만, 2집, 3집을 거듭하며 점점 주류 프로그레시브메탈의 작곡에서 벗어나면서, 이들을 향한 이목도 점점 희미해졌습니다. 이제는 이들의 디스코그라피가 아직도 계속 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청자도 몇 안 남은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세간의 주목에 개의치 않고 이들은 묵묵히 자신의 음악을 계속해왔습니다. 긴 호흡으로 빠르지 않지만 꾸준히, 급격한 변화는 없지만 관성에 머물지 않고, 조금씩 세상의 변화를 수용하며 성장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음악은 단단하고, 짙고, 깊습니다. 단, 다수의 청자는 그 단단함과 짙음, 깊이에 막혀 지나치기가 쉽습니다.
A Darkend Sun은 그러한 Wolverine의 디스코그라피에 연장선상에서 정점을 찍는 것과 동시에 영리함이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형식적인 면에서 (1) 음악과 영상을 융합했으며, (2) 30분 미만의 중편소설의 러닝타임이 눈에 띕니다. 이 두가지 특징은 Wolverine의 음악에서 다소 부족한 쇼맨십을 보충하고, 이들의 매력을 효과적으로 극대화했습니다.
Wolverine의 음악은 정적입니다. 하나하나의 연주를 따지고 들어가면 충분히 역동적이지만, 전반적으로 정적인 분위기가 지배합니다. 노래도 뭔가 화자의 속에 있는 이야기를 끄집어내서 말한다기보다는, 자화상을 관찰하고 그린다는 느낌이랄까요. 음악적으로 단단하고 짙은데, 반대로 청자를 자극시키고 주목하게 하는 음악적인 쇼맨십이 다소 부족합니다.
음악과 일체화된 영상의 존재는 밋밋하고 평면적일 수 있는 Wolverine의 음악을 역동적이고 입체감있게 만들었습니다. 영상 전문가가 아닌 팀의 베이시스트인 Thomas Jansson이 독학으로 제작한 영상은 음악과의 조화가 뛰어납니다. 사실 영상에서 주로 활용한 가면, TV, 꼭두각시, 군중, 벙어리 등의 이미지들은 다소 상투적인 면도 있습니다만, 그래도 음악의 리듬과 흐름, 주제와 너무나도 잘 맞아떨어져서 시각-청각이 일체화된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앨범 전체에서 몇 군데의 편집은 소름이 돋을 정도였습니다. (미리 알려드리면 감동이 떨어질 것 같아서 이건 비밀로 할께요. ^^) 그럴 수만 있다면, 안 본 눈과 안 들은 귀를 산 다음에, 제대로 된 AV가 가능한 곳에서 집중하며 감상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음악을 창작자가 영상도 제작하였기에 음악과 영상의 조합이 탁월할 수 있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이들이 자신의 앨범을 "Audio-Visual EP"라는 용어로 소개한 것은 꽤나 적합합니다.
아무래도 Wolverine의 음악이 지닌 여백으로, 영상과의 결합이 효과적이지 않나 생각합니다. 반대로 Dream Theater의 Scenes from A Memory와 같은 유수의 프로그레시브메탈 컨셉앨범들은 이미 음악에서 많은 것들을 표현하고 있기에, 영상이 과잉이거나 부차적일 수 있습니다.
거기에, 28분 분량도 full-length가 아니어서 드는 아쉬움보다는 충분한 느낌입니다. 중편소설을 읽는 느낌이랄까요. Wolverine의 서사는 장편소설(full-length)을 이끌어갈 만큼 극적이고 흥미로운 사건들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단편소설(single)은 Wolverine의 서사가 지닌 깊이를 담기에 부족합니다. 중편소설(EP)은 장편소설에 준하는 서사가 가능하면서도, 단편소설의 간결함, 탄탄함, 여운을 담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Wolverine의 A Darkend Sun의 길지도 짧지도 않고 꽤나 적절합니다.
사실 28분짜리 Audio-Visual EP는 어디까지나 외형일 뿐이며, 본질은 그 속의 음악이겠죠. 음악도 뛰어납니다. 첫 곡 Phoenix Slain은 이들 특유의 분위기 있는 신디 소리로 "태양이 어두워짐"을 알립니다. 미들템포의 기타백킹리프가 이끌어 가는 두번째 곡 The Breach를 통해 어둠이 깊어지며, 세 번째 곡 Dead as The Moon은 처연함에 휩싸입니다. 6/4의 독특한 비트가 돋보이는 마지막 곡 Hibernator에서 새벽을 되찾습니다. 모두가 다 매력있는 곡이며, 특히 Dead as The Moon의 발라드, 클린톤의 기타, 연민의 따뜻함이 좋습니다.
빠르게는 mp3가 등장한 2000년대 초, 늦게는 스트리밍과 유튜브를 통한 "싱글" 단위의 음원 유통이 대세가 된 2010년대 초를 기점으로 과거 LP-카세트테이프-CD(-MD) 로 이어지던 "앨범" 단위의 작품 발표에 퇴장이 선고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창작자가 심혈을 기울인 작품을 앨범에 담아 발표해봤자, 청자는 스트리밍이나 유튜브로 작품의 부분만을 감상합니다. 앨범 수익의 감소는 말할 것도 없구요. 이제는 락메탈 음악에서도 뮤직비디오는 앨범을 홍보하기 위한 수단 이상의 무엇이 되었습니다. MTV가 출연했을 때도 여전히 radio star는 video로부터 살아남았지만, 이제는 radio star는 생존을 위해 video star로의 변신이 필수가 된 것입니다.
더이상 앨범을 통한 작품 발표의 이유가 사라져가는 시점에, A Darkend Sun은 기존의 앨범 형태가 아닌 YouTube 영상 형태로, 매체의 변화를 시도합니다. 해당 영상은 무료로 시청할 수 있으며, 별도의 광고도 붙어 있지 않습니다. 오직 이들 홈페이지에 링크된 페이팔을 통해 자발적인 지불만 가능합니다. 자신들의 음악을 지키면서도 세상의 변화를 수용하려 하는 Wolverine의 시도를 높게 평가하고 싶습니다.
코로나-19 때문일까요, 기대치 않게 2020년에는, 특히 이번 가을에는 어두운 미학의 뛰어난 앨범들이 꽤 나왔습니다. 그 중에서도 Wolverine의 A Darkend Sun은 독보적인 청각-시각적 경험으로 가장 앞에 두고 싶습니다. 저에게 2020년 최고의 앨범(AOTY)입니다. 아직 이 앨범을 접하지 않았다면, 꼭 좋은 AV 환경에서 단단히 준비된 상태에서 감상하기를 권장합니다. ... 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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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erea –
Coma (2024) |
90/100 Mar 23, 2025 |

TJ가 오해하는 것이 있다. 나는 모던한 음악을 싫어하지 않는다. 내가 팝고딕이나 블랙게이즈를 불호하는 이유는 그것의 모던함 때문이 아니라, 고딕이나 블랙메탈의 정서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고딕메탈 혹은 블랙메탈의 정서를 바탕으로 모던한 음악을 시도하는 팀은 언제나 환영한다. 애초에 음악은 항상 모던해야 한다고, 즉 그 시대에 뒤쳐져서는 안된다는 관점이다. 그런 면에서 Swallow the Sun의 모던한 고딕메탈을 좋아하듯, Gaerea의 모던한 블랙메탈을 좋아한다.
사실 이들의 모던한 사운드스케이프에 가려져서 그렇지, 정통 블랙메탈의 문법에 상당히 충실하고 번뜩이는 면이 있다. 이들의 음악 을 들은 TJ는 음악이 직관적이고, 잘난 척을 안 한다는 평을 남겼다. 명쾌한 감상평이다. 비쥬얼에 있어서 콥스페인팅과 악마주의와 같은 블랙메탈의 "구시대" 관습은 버리는 대신 얼굴과 피부를 검게 가렸다. 이 또한 "블랙"메탈의 비쥬얼일지라.
이들의 국적이 포르투갈이라는 점, 즉 블랙메탈의 변방이라는 점도 인상적이다. 처음에는 뜻밖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포르투갈의 파두(Fado) 음악을 떠올려본다면 Gaerea의 블랙메탈은 꽤나 납득이 간다. 자신들의 본거지인 포르투의 장소성을 잘 활용한다.
무엇보다 Gaerea는 멋져서 좋다. 얼굴을 버리고 대신 몸의 움직임에 집중한다. 컨셉질도 과하지 않다. 뮤비의 땟깔도 좋고, 무대 장악력이 뛰어나다. 90점과 95점 사이로 평가한다. ... 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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閃靈 (Chthonic) –
武德 (Bu-Tik) (2013) |
90/100 Mar 4, 2025 |

Defenders of Bu-tik Palace 한 곡만으로 충분히 가치 있습니다. 나머지 곡은 기대에 못 미치지만... 질주감과 완급조절, 멜로디가 수려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음계와 얼후, 중국 성조의 여성보컬 활용으로 독자성을 갖추었습니다. 무덕전을 소재로 한 곡의 주제 의식 또한 훌륭하고, 청나라·일본군·국민당과 맞서싸우는 뮤직비디오의 서사와 잘 어우러집니다. 따라서 Defenders of Bu-tik Palace는 Bu-Tik 앨범 뿐만 아니라 Chthonic 디스코그래피의 정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멜로딕 블랙메탈 명곡으로 꼽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입니다. [[失竊千年 / Timeless Sentence] 앨범에서 선보인 이 곡의 어쿠스틱 버전 또한 수작 이니 놓치지 않기 바랍니다. ... 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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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thonic –
失竊千年 / Timeless Sentence (2014) [Compilation] |
95/100 Feb 18, 2025 |

본작은 Chthonic의 대표 작인 高砂軍(Takasago Army; 2011)와 武德(Bu-Tik; 2013)의 대표곡을 어쿠스틱 버전으로 편곡하였습니다. 헤비메탈에서 디스토션과 익스트림보컬, 파워 드러밍 등 헤비니스 요소들을 제거한 어쿠스틱 편곡은 나름의 의외성과 서정성으로 매력적일 때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제는 헤비메탈의 어쿠스틱 편곡은 중견 밴드의 이정표라고 해야할까요? 그 정도로 종종 시도되어서 나름의 신선함과 식상함이 함께 합니다. Chthonic의 어쿠스틱 편곡은 과연 어떨까요?
Bu-Tik에서와 마찬가지로 본 어쿠스틱 앨범에서도 暮沉武德殿(Defenders of Bú-Tik Palace)이 대미를 장식합니다. 우리말로 읽고 번역하면 "모침무덕전", “황혼의 무덕전”이 되는 이 곡의 후렴구 가사와, 그것의 한국어 한자 독음 및 그 뜻을 정리해봤습니다.
萬劫不復 (만겁부복)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다.
數百年 戰袂煞 我輩武德 (수백년 전몌살 아배무덕 수백년) 악령과의 싸움, 우리의 무덕이여.
千萬人 拚袂退 勇者無敵 (천만인 변몌퇴 용자무적) 천만인과 싸워 물러나지 않는, 무적의 용자여.
千年也萬年 (천년야만년) 천년과 만년이 지나
我孤魂已束縛佇遮 千年也萬年 (아고혼이속박저차 천년야만년) 내 외로운 영혼은 천년만년 갇혔으며
生死簿的名字 (생사부적명자) 생사부(생명책)에 적힌 이름들이
目睭前一逝一逝 生死簿的名字 (목추전일서일서 생사부적명자) 내 눈앞에서 사라져 가네 생사부의 이름들이
이제는 자기 이름의 한자를 쓰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의 한자 실력이지만, 그래도 한자 문화권에서 한자를 조금이나마 배운 경험이 좋을 때가 있습니다. 한국어 한자 독음으로 가사를 접하니 단순히 번역기가 알려주는 가사의 의미 이상으로 가사의 질감과 운율을 느낄 수 있네요. 마치 한시를 읽듯이 말입니다.
무덕은 중의적 표현으로 해석합니다. 굳셀 武, 덕 덕. 즉 지배, 불의, 폭력에 대한 싸움(武)의 덕(德)을 칭송하는 동시에, 무덕전은 일본 뿐만 아니라 일제시대 우리나라와 대만에서 경찰과 청년학생 검도 및 유도를 훈련시킨 도장을 뜻합니다. 대만의 여러 무덕전 중 이 곡의 배경이 된 무덕전은 1930년대 대만 원주민들의 일제에 저항한 우서사태 당시 이를 진압했던 일본군이 주둔한 곳이기도 하며, 또한 1947년 2.28 사태 당시 국민당에 저항한 시민군이 주둔한 곳이라고 합니다.
즉, 무덕전에서 발생한 식민지배와 독재에 저항한 자유 정신, 그 과정에서 발생한 무수한 죽음, 현세에 전해 내려오는 이들의 무덕. 그것이 황혼의 무덕전 혹은 무덕전의 수호자가 노래하는 무덕입니다.
어쿠스틱 버전 모침무덕전의 뮤직비디오(https://youtu.be/kta4ZAwI6rY)는 2.28 사태에 학살의 서사와 함께 실제 무덕전을 무대로 한 어쿠스틱 라이브를 연출했습니다. 만약에 아직 이 뮤직비디오를 본 적이 없다면 정독과 정청을 권장합니다.
역사 속 사연의 안타까움과 자연의 무심함, 무대 위 연주자의 집중력과 마루에 정좌한 관객들의 시선이 하나의 호흡으로 어우러집니다. 장면 장면에 실제가 주는 진실과 연출이 주는 극적 효과가 교차합니다. 예를 들어, 뮤직비디오 속 어쿠스틱 라이브는 연출이지만, 후반부에 노래를 같이 부르는 관객의 모습은 실제의 모습으로 보입니다.
저도 어느새 한국어 한자 독음으로 노래를 따라 부르게 됩니다. 반복되는 萬劫不復(만겁부복)과 千年也萬年(천년야만년)에 울림이 있습니다. 즉, 끝없는 시간 속(千年也萬年) 사람의 의지는 시간을 초월합니다(萬劫不復; Timeless Sentence). 사람의 삶과 죽음, 존재와 기억의 무게를 다시금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역사의 기억을, 그 아픔과 자긍심을 공유합니다. 무덕전에서의 무덕과 죽음의 이야기는 대만뿐만 아니라, 3.1. 4.3, 4.19, 5.18를 겪은 대한민국의 이야기입니다. 더 나아가 외세, 제국주의, 독재, 근본주의 종교에 지배되고 독립하기 위해 저항했던 제3세계 인류의 일반적인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Chthonic의 음악은 대만 원주민의 역사와 한족의 이주, 일제의 통치와 태평양전쟁, 중국국민당의 이주(국부천대)와 독재, 민주화까지 대만을 노래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점은 반일, 반중, 반미와 같이 특정 지배세력을 적으로 규탄한 “투쟁가” 아닌, 어디까지나 역사적 서사 속 개인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그래서 일제에 저항한 시디크족도, 일본군에 지원 혹은 징집되어 카미카제로 옥처럼 부서진(玉碎; Broken Jade)화한 타카나고 의용대도, 민주화 운동가 등 각각 충돌할 수 있는 역사사회적 맥락들이 개인의 무덕으로 동일 선상에 놓이게 됩니다.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면, 월드뮤직으로 들어도 괜찮을 정도로 어쿠스틱 편곡도 상당히 공을 들인 티가 납니다. 단순히 일렉트릭 악기를 어쿠스틱 악기로 바꿔서 연주한 것이 아닌, 기타와 키보드 라인, 드럼 리듬도 새롭게 바꾸었습니다. 어쿠스틱 앨범 코멘터리 영상(https://youtu.be/X2R5COFCOLY)을 보니 키보드와 드러머가 어쿠스틱 편곡을 할 때 정말 힘들었다고 투덜거리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또한 익스트림 보컬도 상당수는 라인을 새롭게 만들고, 일부는 멜로디 악기의 라인을 활용하고, 일부는 읊조리는 것으로 대체했습니다. 보컬 멜로디가 없는 익스트림 메탈의 특성상 어쿠스틱 편곡을 하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계속 그로울링 혹은 스크리밍을 읊조리는 것만으로 대체해봐야 재미가 없는데, Chthonic은 보컬의 노래와 읊조림을 적절히 분배했습니다. 성조가 강한 언어여서 그런지 읊조림도 높낮이의 변화와 운율이 있어서 밋밋하지 않고 흥미롭습니다. 한시를 낭송하는 느낌입니다.
Chthonic의 작품 덕분에 대만의 역사와 문화, 사회를 보다 이해하고 주목하게 됩니다. 아마 저 뿐만 아니라 대만의 리스너도, 한국과 일본의 리스너도, (아마 중국을 제외한) 세계의 리스너도 같은 반응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취와 위상을 가진 밴드가 우리나라가 아닌 대만에 있다는 것에 아쉬움과 부러움을 가집니다. ... 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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