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hrax –
Persistence of Time (1990) |
(100/100) Dec 31, 2020 |

웃음기를 빼내고 황금기를 빛내다
1990년은 스래쉬 메탈이 바야흐로 정점에 도달했던 시기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스래쉬 장르는 80년대 중후반에 이미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지만, 1990년에 발매된 다수의 독보적인 스래쉬의 명작들은 이 시기야말로 스래쉬 메탈의 절정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어준다. Megadeth의 Rust in Peace라는 기념비적인 명작을 필두로 하여 Seasons in the Abyss, Coma of Souls, By Inheritance 등과 같은 고전적인 작품들이 모두 1990년에 발매되었고, Spectrum of Death, Tortured Existence, The Awakening 등 흔히 데스래쉬라고 불리는 살벌한 걸작들 역시 1990년에 선보였다.
소위 말하는 스래쉬 ‘Big 4’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Anthrax의 Persistence of Time또한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 1990년 8월에 발매되었다. 흔히 Anthrax는 Big 4의 마지막 자리에 위치하며 ‘사천왕 최약체’라는 불명예스러운 인식이 깔려 있을 뿐 아니라 Testament나 Exodus 같은 밴드가 Anthrax의 자리를 대신해야 한다는 농담 반 진담 반 이야기들도 유튜브 댓글 등지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을 정도이다. 물론 Anthrax가 상대적으로 Big 4의 나머지 밴드들에 비해 판매고나 인지도 등에 있어서 밀리는 것은 사실이지만 Anthrax 역시 분명히 Big 4의 한 축으로써 총 1000만 장 이 상의 음반 판매고를 올린 대형 밴드로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는 것은 분명하다.
비록 Anthrax의 스타일 및 특징이 흔히 ‘유쾌함’으로 정의되며 그와 함께 랩 메탈 등의 장르에 떨친 영향력 및 실험적인 시도 위주로 평가받고는 하지만 이들의 진지한 면모가 돋보인 5집 Persistence of Time이야말로 이들의 실력이 최고조에 도달했던 앨범이라고 생각한다. 이전까지 유머러스하고 유쾌한 테마 위주를 선보였던 Anthrax는 이 작품에서 더욱 진지하고 사색적인 테마를 차용했으며 음악의 분위기 역시 상대적으로 어둡고 진중해진 느낌으로 변화했다.
밴드의 핵심 멤버 Scott Ian에 따르면 당시 그들은 Judas Priest나 Iron Maiden처럼 진지한 음악을 하고 싶었다고 한다. 밴드에서 작곡을 담당했던 Charlie Benante와 Scott Ian은 이 작품을 인간의 불화와 위선 등을 다룬 어두운 분위기의 앨범으로 만들고 싶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베이시스트 Frank Bello는 자신의 아이디어가 앨범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반영되지 못한 것에 불만을 갖기도 했고, 당시 보컬 Joey Belladonna역시 Scott Ian과의 시각 차이로 인해 불화가 생기기도 했으며 이는 이후 보컬 교체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뿐 아니라 1990년 1월에는 그들의 리허설 스튜디오에서 화재가 발생해 많은 장비들을 잃기도 하는 등 이 앨범의 제작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은 여정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발매된 이들의 다섯 번째 앨범 Persistence of Time은 평단의 호평과 함께 빌보드 차트 24위에 이름을 올리며 당시 그들의 차트 최고 기록을 갱신하기도 했다.
째깍거리는 시계 소리와 함께 시작하는 첫 번째 곡 Time은 다소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의 인트로로 이전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스타일로의 변화를 곧바로 체감하게 해 준다. 기타와 또렷하게 들리는 베이스의 무게감 있는 톤이 눈길을 끌며, 적당한 빠르기 속에서 점차 흥을 돋운다. 분위기의 완급조절과 제법 다채로운 구성으로 7분에 달하는 곡 내내 독특하고 재미있는 사운드를 들려준다.
자연스레 이어지는 다음 곡 Blood 역시 Time과 함께 개인적으로 앨범 내에서 가장 좋아하는 트랙 중 하나이다. 우선 헤비하고 강렬한 인트로로 귀를 사로잡으며 스래쉬 특유의 맛깔나는 리프들이 뒤를 잇는다. 보컬 Joey Belladonna의 독특한 음색과 랩을 하는 듯한 보컬 스타일이 돋보이기도 하며, 중독성 넘치는 코러스 부분 역시 빼놓을 수 없는 킬링 파트이다. 곡 후반부로 접어들며 기타 솔로로 접어드는 전개 또한 더욱 풍성한 매력을 느끼게 해 준다,
더욱 헤비하면서 그루브함을 강조하는 Keep It in the Family역시 질주감으로 대표되는 통상적인 스래쉬 스타일과는 차이를 두는 스타일이 두드러지는 곡이다. 또한 자유자재로 템포를 조절하기도 하면서 7분가량의 곡을 지루하지 않게 역동적으로 이끌어나간다. 재치 있는 보컬과 육중한 브레이크다운이 인상적인 곡이기도 하다.
흥겨운 느낌을 더하는 네 번째 곡 In My World는 시종일관 고조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며 자신감 넘치는 가사에 어울리는 캐치하면서도 강렬한 사운드를 들려준다. 한편 스래쉬 특유의 미친 듯한 질주감을 선보이는 Gridlock은 스래쉬 메탈 밴드로서의 정체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트랙이다. 차진 리프들과 격렬한 전개가 인상적이며 장르적 쾌감을 느끼게 해 주는 곡이었다.
반면 여섯 번째 곡 Intro to Reality는 연주곡이자 다음 곡 Belly of the Beast와 이어지는 일종의 인트로 기능을 한다. 하지만 독특하고 몽환적인 도입부와 뒤를 잇는 강렬하고 재미있는 전개로 이 곡 자체도 수준 높은 연주곡으로서의 가치를 지니며 앨범의 중간에 위치해 분위기를 환기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 느낌을 그대로 이어받는 Belly of the Beast또한 매우 빠르지는 않지만 재미있는 리프들과 구성이 돋보이는 킬링 트랙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원곡 이상으로 유명한 커버 곡이자 이들의 히트곡 중 하나인 Got the Time은 커버 곡에 일가견이 있는 Anthrax의 재치 있는 편곡 능력이 다시 한번 돋보인 곡이다. 3분이 되지 않는 짧은 트랙이지만 강렬한 도입부와 중독성 넘치는 코러스, 멋진 베이스 솔로까지 있을 건 다 있는 굵은 트랙이다.
9번 트랙 H8 Red도 Anthrax 특유의 재치 있는 면모가 부각되는 곡이며 부담 없이 가볍게 즐길 수 있는 트랙이다. 한편 다음 곡 One Man Stands에선 인간의 자유에 대한 진지하고 뚜렷한 주제의식이 담긴 가사처럼 다시금 진중함을 조금 더 강조했다. 마치 RATM처럼 힘 있게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태도와 높은 완성도의 전개가 인상적이었던 트랙이었다.
마지막 곡 Discharge는 하드코어 펑크적인 색채도 다소 느낄 수 있는 빠른 템포의 곡이다. 본 앨범의 일본반 보너스 트랙에 하드코어 펑크 밴드 Discharge의 커버 곡이 수록된 것을 보면 아마도 그 밴드를 염두에 두고 만든 곡 같았다. 마치 Metallica의 Dyers Eve같은 곡처럼 마지막으로 한바탕 내달려 주는 분위기 속에서 앨범을 마무리했다.
이렇듯 이 앨범은 더욱 어둡고 헤비해진 분위기와 한층 더 진지해진 Anthrax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매우 우수한 작품이었다. 일부 곡에서는 약간의 프로그레시브함을 더하거나 그루브/랩 메탈의 프로토타입적인 면모를 보여주기도 하는 등 기존 스래쉬의 틀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다만 그러면서도 기본적으로는 스래쉬 메탈 Anthrax만의 정체성을 유지함으로써 조금 색다르지만 더욱 훌륭한 작품을 탄생시켰다고 생각한다. Big 4의 다른 밴드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평가된 편이라고 생각하는 Anthrax 멤버 각자의 기량도 돋보였다. 기존 창법에 약간 변화를 주면서 더욱 역동적이고 성숙한 느낌의 보컬을 선보인 Joey Belladonna를 필두로 재미있는 곡 구성과 리프들이 돋보인 Scott Ian, 멜로딕한 솔로를 보여준 Dan Spitz, 베이스의 중요성을 다시금 깨닫게 해 주는 Frank Bello, 그리고 출중한 드러머이자 작곡가로서 Anthrax의 한 축을 담당하는 Charlie Benante모두 뛰어난 기량을 선보였다.
앞서 언급한 대로 개별 곡들의 완성도가 전반적으로 뛰어난 편이고, 전체적으로도 상당히 다채로운 구성으로 한 시간에 가까운 짧지 않은 앨범을 지루하지 않게 이끌어 나가는 힘을 보여주었다. 우선 초반부에 7분 내외의 긴 트랙들을 배치해 달라진 스타일을 어필하면서도 Gridlock같은 스래쉬의 기본에 충실한 스타일을 선보인다. 이후로는 분위기를 전환하는 연주곡 Intro to Reality와 이어지는 Belly of the Beast로 더욱 흥미로운 전개를 펼치며, 특유의 매력이 두드러지는 커버곡 Got the Time 등 다양한 매력을 모두 맛볼 수 있는 짜임새가 무척 인상적이다. 마지막 세 곡의 임팩트가 상대적으로 떨어진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이 곡들도 제법 괜찮을 곡일뿐더러 One Man Stands처럼 꽤 강렬한 한 방을 먹이는 곡도 있어서 끝까지 집중하며 즐길 수 있었다.
비록 이 앨범 이후 Anthrax는 John Bush로의 보컬 교체와 음악적 스타일의 더욱 큰 변화를 시도했지만, 많은 스래쉬 메탈 밴드들과 마찬가지로 90년대 중후반을 침체기 속에서 보내야 했다. 특히 Anthrax의 경우 00년대에 들어서도 뜸한 앨범 발매 주기와 보컬 재교체 문제 등으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지만, Joey Belladonna의 귀환 이후 2011년 발매된 Worship Music과 2016년의 For All Kings가 모두 상당한 호평과 함께 이들의 차트 성적까지 갱신하면서 Anthrax는 2010년대 들어 다시금 전성기 시절 못지않은 위치에 자리 잡을 수 있었다.
Anthrax의 재기가 성공할 수 있었던 원인 중 하나로 Persistence of Time의 존재를 이야기하고 싶은데, 그 이유는 보다 진중한 스타일로의 변화를 시도했던 이 작품이 기반이 되어 더욱 성숙한 스타일을 선보인 2010년대의 두 앨범이 탄생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예로 Worship Music의 In the End, Judas Priest나 For All Kings의 Blood Eagle Wings같은 6~7분대의 대곡 구성은 Persistence of Time에서 이미 시도된 적 있으며, 마찬가지로 두 앨범의 진지한 분위기와 테마 및 헤비한 스타일 역시 5집으로부터 그 뿌리를 찾아볼 수 있다. 나이를 먹으며 오히려 역량이 더 강화된 느낌을 주는 Joey Belladonna의 보컬 역시 본인은 마땅찮아 했지만 결과적으로 5집 당시의 경험이 도움을 주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이렇듯 Persistence of Time은 유쾌함으로 대표되는 Anthrax의 스타일에서 탈피를 시도한 작품임에도 더욱 성숙하고 진지한 스타일로의 변화를 성공적으로 이루어냄으로써 대표작 Among the Living 못지않은 값진 성과를 거두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Rust in Peace나 Seasons in the Abyss같은 1990년을 대표하는 명반들이 해당 밴드들의 기존의 80년대 스타일에서 다소 변화를 줌으로써 탄생한 것처럼 Anthrax의 Persistence of Time역시 변화를 통한 발전을 이루어낸 사례이자 스래쉬의 황금기를 장식한 또 하나의 명반이었다.
Anthrax는 이 앨범의 30주년을 맞아 본작의 30주년 기념 리마스터 재발매반을 발매하기도 했고, 코로나 사태로 인해 온라인으로 진행된 Wacken World Wide 2020에서 5집 수록곡 Time을 공연하기도 했다. 또한 Scott Ian은 인터뷰를 통해 코로나 사태가 진정되고 투어가 가능해지는 대로 새 앨범을 제작할 것이라고 밝혔다. 슬레이어가 2019년 마지막 투어를 끝으로 사실상 해체해버린 이상 2010년의 The Big Four: Live같은 기념비적인 공연은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려워졌지만, 여전히 활동 중인 나머지 밴드들, 특히 2010년대 들어서도 굳건한 모습을 보여준 Anthrax의 행보는 앞으로도 기대해 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99/100 ... 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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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ptunian Maximalism –
Éons (2020) |
(95/100) Oct 31, 2020 |

“양보를 선택한 순간 예술가는 예술가가 아니다.”
Alejandro Jodorowsky의 영화 The Holy Mountain을 본 적이 있는가? 영화사를 통틀어 가장 기념비적인 ‘괴작’ 중 하나인 이 작품은 난해하고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로 가득 차 있지만 동시에 희대의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는 작품이다. 비록 그의 영화를 전부 이해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시대를 초월한 수준의 강렬한 이미지들은 그 자체로서 관객에게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잊을 수 없는 정신적인 체험을 경험하게 해 준다. 추가로 예를 들자면 Kenneth Anger의 Lucifer Rising 같은 영화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영화들은 이해의 영역에서 벗어나 영상 그 자체로 독특한 체험을 가능케 해 준다는 점에서 많은 팬들을 만들었고 현재까지도 다방면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몇 달 전 무려 두 시간이 넘어가는 거대한 괴작을 들고 혜성처럼 등장한 벨기에의 밴드 Neptunian Maximalism의 데뷔작 Éons역시 마찬가지라고 말할 수 있겠다. 2018년 리더Guillaume Cazalet(예명:CZLT)에 의해 결성된 이 밴드는 CZLT가 색소포니스트 Jean Jacques Duerinckx와 함께 즉흥 연주를 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CZLT의 친척 Sebastien Schmit과 Pierre Arese가 드러머 및 기타 타악기 담당으로 합류하면서 라인업이 완성되었다. 그들은 이틀 동안 즉흥 연주를 이어가면서 녹음을 마쳤고, 이후 Czlt가 세 달 동안 이 결과물들을 정리하면서 보컬 및 세션 부분들을 멤버들과 함께 추가로 녹음했다. 그렇게 이 앨범이 탄생하였으며, 기본적으로 이 작품은 거의 대부분이 사전 작곡 없이 즉흥 연주에 기반하여 만들어졌다. 이들이 즉흥성을 강조한 이유는 즉흥 연주가 그들의 영혼 그 자체를 어떠한 제약 없이 곧이곧대로 표현해 낼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특히 색소폰 솔로의 경우 원테이크로 녹음된 경우도 있다고 한다.
앨범의 테마 또한 실로 비범하고 초현실적인 소재를 삼고 있는데, 밴드의 마스터마인드 CZLT에 따르면 앨범은 인류, 즉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자리를 진화된 코끼리가 대체한다는 황당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는 인류는 현존하는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아닌 ‘Homo-Sensibilis’로 진화해야 함을 제시하며, Homo-Sensibilis란 자신이 모르는 것을 아는 존재라고 상정했다. 즉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가 아닌 ‘나는 느낀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개념이라고 한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지 이해를 하지 않아도 좋다. 해당 부분은 CZLT의 인터뷰 내용을 그대로 직역한 것에 불과하다.)
또한 인류는 동물과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하며, 동물을 ‘잠재적 인간’으로 여겨 우리 인간과 동등하게 대우할 필요도 있음을 언급했다. 또한 몇몇 종들은 더욱 높은 의식 수준을 지닌 존재로 진화할 잠재력을 지니고 있으며 특히 코끼리의 경우 실제로 진화 과정에서 인류 못지않은 의식수준을 가질 수 있었다고도 말했다. 그리하여 앨범의 마지막 부분에 다다르면 자의식을 갖춘 진화한 코끼리들, 일명 ‘Proboscidea-sapiens’들이 인간을 대체하고 스스로의 문명을 발달시켜 HELIOZOAPOLIS라는 도시를 건립하게 되는 내용이 등장한다.
앨범의 가사는 한술 더 떠서 인류의 원시 언어를 상정하여 만들어낸 가상의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 다만 이러한 가상의 언어는 아무렇게나 막 만든 것이 아니라 케임브리지 대학의 언어학자 Pierre Lanchantin의 연구를 통해 만들어진 언어라고 한다. 앨범의 부클릿에는 이 원시 언어를 적은 가상의 문자가 적혀 있기도 하다.
이처럼 이 앨범은 온갖 기기묘묘한 설정으로 가득 차 있지만, 이 앨범의 음악을 즐기는 데 있어 그러한 배경에 대해 하나하나 분석할 의무는 없다. 애초에 앨범의 가사가 인류의 원시 언어를 가정한 가상의 언어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이 부분은 어떤 의미이고 저 부분은 어떤 의미인가 하는 불필요한 분석이 무의미함을 역설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이 리뷰는 앨범의 내·외적 정보와 혹시나 작품 감상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개인적인 해석 등을 전달하기 위해 자세하게 서술해 본 것이다.
Neptunian Maximalism의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사람의 눈길까지도 잡아채는 마력을 지닌 앨범 커버는 일본의 화가 KANEKO Tomiyuki의 2014년도 작품이다. 작품의 소재인 Vajrabhairava(바즈라바이라바, 야만타카로도 불린다.)는 티베트 불교에서 등장하는 문수보살의 화신이며 앨범 내에서도 주요한 소재 중 하나로 다루어진다.
앨범은 3CD, 3LP로 이루어져 있으며 도합 2시간 8분 정도의 방대한 분량을 담고 있다. (유튜브에 전체 앨범으로 올라와 있는 영상은 2시간 13분 정도인데 각각 곡의 끝부분에 공백이 불필요하게 담겨 있으니 Bandcamp 스트리밍 등의 다른 방법으로 듣는 것을 추천한다) 또한 각각의 디스크에 To The Earth(Aker Hu Benben), To The Moon(Heka Khaibit Sekhem), To The Sun(Ânkh Maât Sia)이라는 제목과 부제가 달려 있다. 우선 지구, 달, 태양의 이름을 따온 것은 점성술에서 차용한 것으로, 한때 지식으로 여겨졌던 점성술적 가치에 대한 오마주를 담아낸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괄호 안의 부제는 이집트 신화의 신 또는 관련 용어에서 따온 것이다. 각각의 디스크에 수록된 곡명은 ‘개별 디스크명-세계 곳곳의 문화에서 따온 소재-앨범의 스토리와 흐름을 서술하는 부분’ 순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리뷰에선 편의상 개별 디스크명은 생략하겠다. 앨범의 흐름은 대강 지구의 탄생과 역사, 인간과 자의식을 가지게 된 동물들 간의 대립과 동물들의 승리, 그리고 이 'Proboscidea-sapiens'라고 이름 붙여진 진화된 동물들의 번영으로 이루어져 있다. 곡명에는 지질학에서 사용되는 용어나 세계 각국의 신화 및 오컬트 등과 관련된 단어들이 많이 담겨 있으며 이에 대한 서술은 단지 개인적인 해석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어지는 부분이 복잡하고 요상하게 느껴질 수 있으니 양해 바란다.
첫 번째 디스크 To The Earth의 첫 번째 곡 Daiitoku-Myōō no ŌDAIKO 大威徳明王 鼓童 - L'Impact De Théia durant l’Éon Hadéen는 명왕누대, 즉 선캄브리아 시대와 약 45억 년 전 지구와 충돌하여 달 탄생의 원인이 되었다고 하는 거대 충돌설 속의 천체 테이아(Theia)에 대한 곡이다. 여기서 大威徳明王, 대위덕명왕은 불교에서 갈라져 나온 밀교에 등장하는 5대 명왕 중 하나이자 아미타불에 대응하는 존재이다. 또한 鼓童는 일본어에서 심장박동으로 풀이된다. 종합해 보면 테이아와의 충돌로 달이 형성되고 격변했던 지구를 대위덕명왕의 고동으로 표현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이 곡은 유일하게 사전에 앞서 작곡된 리듬에 따라 진행되는 곡으로, 바리톤 색소폰의 육중한 울림과 규칙적인 리듬이 강렬한 첫인상을 남겨 준다. 이윽고 조금씩 악기가 추가되고 변주되면서 분위기를 고조시켜 나가며, 후반부의 색소폰 솔로는 마치 대취타의 태평소를 떠올리게 만드는 동양적인 느낌을 주기도 했다. 중독성 넘치는 리듬으로 앨범의 포문을 활짝 열고 청자의 관심을 끄는 신묘하고도 강렬한 곡이었다.
두 번째 곡 NGANGA - Grand Guérisseur Magique de l’ère Probocène에서 NGANGA, 즉 응강가는 콩고어로 영적 치유사를 의미하며 아프리카의 여러 지방에서 무당과 같은 역할을 수행한 존재이다. 그리하여 이 곡은 인류 이후의 시대, 즉 Probocene Era의 영적 치유사 응강가를 상정하고 있는 곡이다. 좀 더 이국적이고 토속적인 분위기로 시작하는 이 곡에선 우선 진득한 베이스라인이 귀를 사로잡으며, 서서히 쌓아 올리는 곡 구성으로 조금씩 빨려 들어가는 기묘하지만 매력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세 번째 곡 LAMASTHU - Ensemenceuse du Reigne Fongique Primordial & Infanticides des Singes du Néogène의 LAMASTHU(Lamashtu), 즉 라마슈투는 메소포타미아 신화에서 갓난아기들을 납치해 살해한 악마이며, 이 앨범에서는 신생대의 제 3기 시기 에 영장류, 즉 인간의 새끼들을 살해한 존재로 여겨진다. 이 곡은 실로 파괴적인 도입부로 시작한 다음 극단적으로 무겁고 느린 드론 둠 사운드를 보여준다.
네 번째 곡 PTAH SOKAR OSIRIS - Rituel de l’Ouverture de la Bouche dans l’Éon Archéen에서 PTAH SOKAR OSIRIS는 각각 이집트의 창조신 프타, 죽은 자들과 묘지의 신 소카르, 죽음의 신 오시리스를 뜻한다. 그 다음 부분은 시생누대, 즉 명왕누대 이후 지구의 40억 년 전~25억 년 전 시기, 즉 생명이 태동하던 시기를 의미한다. 개인적으로 앨범 내에서 최고로 손꼽는 이 트랙은 앞선 곡과 이어지며 무거운 분위기 또한 넘겨받아 장중하게 시작했다가 곧이어 일정한 리듬이 반복되며 조금씩 분위기를 고조시켜나간다. 색소폰과 기타(+시타르)가 연주를 주고받으며 신비로운 분위기를 북돋을 뿐 아니라, 길게 뻗어 나가는 보컬의 절규 이후 이어지는 색소폰의 육중한 울림은 실로 청자를 짓이기는 수준의 무게감을 보여준다. 이후 분위기는 최고조에 다다랐다가 사뿐히 연착륙을 하듯이 내려앉으며 다음 트랙으로 이어진다. 연주와 분위기, 그리고 곡 구성에 이르기까지 가공할 만한 마력을 지닌 곡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다섯 번째 곡 MAGICKÁ DŽUNGL'A - Carboniferous에서 DŽUNGL'A(Džungla)는 폴란드어로 밀림을 의미하며 Carboniferous는 식물이 번성했던 석탄기를 의미한다. 2분이 조금 넘는 짤막한 이 곡에선 저음의 기타에 즉흥 연주가 더해진다.
여섯 번째 곡 ENŪMA ELIŠ - La Mondialisation ou la Création du Monde: Éon Protérozoïque에서 ENŪMA ELIŠ, 에누마 엘리시는 메소포타미아 신화의 창세 서사시이다. 이 곡은 Éon Protérozoïque, 즉 시생누대 이후의 원생누대에 대한 곡이다. 베이스가 이끌어 가는 이 곡은 주술적인 보컬로 사이키델릭한 분위기를 더하고, 중반부에서는 걸쭉한 베이스라인의 참맛을 느낄 수도 있다. 곡 후반부에선 첫 번째 디스크를 끝맺는 장중한 마무리를 선사한다.
이와 같이 첫 번째 디스크는 강렬한 오프닝부터 장엄한 마무리에 이르기까지 록/메탈의 격렬함과 프리 재즈의 즉흥성, 그리고 토속적이고도 오컬트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분위기가 조금씩 모두 공존한다. CZLT에 따르면 To The Earth는 신성함과 불경스러움, 사랑과 증오, 여성성과 남성성 등의 균형을 표현한 작품이라고 한다. 전반적으로 볼 때 세 개의 디스크 중에서 그나마 가장 접하기 쉬운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 트랙의 캐치함과 중독성, 네 번째 곡의 치밀한 구성과 마지막 곡의 진중한 마무리 등 킬링 트랙이 집중되어 있는 디스크라고 말할 수 있겠다.
두 번째 디스크 To The Moon의 첫 번째 곡 ZÂR - Empowering The Phurba / Éon Phanérozoïque에서 ZÂR는 에티오피아 등 동부 아프리카에서 악령 또는 혼령을 의미하는 존재로, 인간에게 빙의하여 해악을 끼치는 대상이다. 또한 Phurba는 티베트 불교에서 각종 의식이나 엑소시즘 등에서 사용했던 도구이고, Phanérozoïque는 원생누대 이후의 현생누대, 즉 캄브리아기부터 현재까지를 의미한다. 인트로부터 더욱 기이하고 오컬트적인 느낌을 부각시키는 이 곡은 첫 번째 디스크보다도 더욱 어두운 분위기를 만들어간다. 혼란스러우면서도 은근히 캐치한 면모가 있는 곡이고, 잔뜩 이펙터를 먹인 기타와 드럼, 베이스가 이루는 오묘한 조화를 듣는 재미가 있다.
이어지는 두 번째 곡부터 네 번째 곡까지는 VAJRABHAIRAVA Part I~III로 이루어져 있다. 앨범 커버의 소재이기도 한 VAJRABHAIRAVA는 야만타카(Yamantaka)로도 불리며 밀교에서 죽음의 신 야마를 정복한 존재이자 앞서 언급한 대위덕명왕과도 대응되는 개념이다. Part I의 Nasatanada Zazas!는 ‘지옥의 문아 열려라!’ 라는 뜻으로 악마 내지는 악령을 소환하는 주문이며, Part III에서 Quaternary Era는 신생대의 마지막 시기이자 인류가 출현하여 존재해 오고 있는 현재까지를 의미한다. 이러한 일련의 VAJRABHAIRAVA Part I~III는 인류와 진화한 동물들 간의 전쟁을 의미한다고 해석할 수 있겠다.
VAJRABHAIRAVA Part I - The Summoning (Nasatanada Zazas!)에서는 기타의 거친 트레몰로 연주와 원시 인류의 가상 언어 보컬로 청자의 멘탈을 잔뜩 휘저어 놓는다. 붕 뜬 기타와 철저하게 내리깔은 보컬 및 베이스의 요상한 공존이 형용하기 어려운 독특한 분위기를 이끌어낸다. 가장 짧은 트랙 VAJRABHAIRAVA Part II - The Rising은 사이키델릭함으로 가득 찬 기타 솔로로 이루어져 있으며 다음 곡 VAJRABHAIRAVA Part III - The Great Wars of Quaternary Era Against Ego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이 곡에서는 기타를 포함한 전반적인 연주가 더욱 거칠어지기도 하며 긴박하고 긴장감 있는 전개를 보여준다. 제목 그대로 한바탕 전쟁을 벌이는 듯 혼란스러운 연주가 이어지다가 서서히 사그라지며 곡이 마무리된다.
다섯 번째 곡 IADANAMADA! - Homo-sensibilis se Prosternant sous la Lumière Cryptique de Proboscidea-sapiens 에서 IADANAMADA!는 사탄 교회의 창립자 Anton LaVey의 저서 The Satanic Bible에 등장하는 표현이며, 이는 16세기 영국에서 일명 ‘천사의 언어’로 만들어졌던 에노키안(Enochian) 언어로 된 말이다. 이어지는 대목은 Proboscidea-sapiens, 즉 진화한 코끼리 앞에 인류가 무릎 꿇게 됨을 의미한다고 본다. 이 곡에서는 분위기가 전환되며 무게감을 강조한다. 장중한 분위기 속에서 곡을 이끌어 가는 색소폰의 울림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보컬이 합류하며 곡이 마무리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여섯 번째 곡 Ol SONUF VAORESAJI! - La Sixième Extinction de Masse: Le Génocide Anthropocène에서 Ol SONUF VAORESAJI 또한 The Satanic Bible에 등장하는 에노키안으로 작성된 표현이며, ‘사탄의 선언’ 중 첫 번째 대목에 있는 표현이다. 이어지는 대목은 여섯 번째 대멸종, 즉 인류의 종말을 의미한다. 다채로운 타악기 소리로 혼란스러움을 부각시킨 이 곡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느릿느릿 울려 퍼지는 다른 악기들과의 부조화가 특징이다. 하지만 이내 다른 악기들도 조금씩 혼란스러운 연주에 동참하며 그야말로 종말에 어울리는 카오스를 보여준 뒤 점차 사그라진다. 곡 뒷부분의 늘어지는 마무리는 아무래도 이 곡이 두 번째 디스크를 마무리하는 트랙이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앨범 내에서 가장 지루하게 느껴졌던 부분이었다. 특히 전체 앨범을 한 번에 완주할 때 이 곡 부분이 가장 늘어지는 느낌이라 아쉬움이 남았다.
이처럼 두 번째 디스크 To The Moon는 더욱 거칠고 혼란스러운 면모를 보여주며 To The Earth보다도 기괴하고 매니악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VAJRABHAIRAVA 삼부작에서는 블랙 메탈의 영향력이 드러나고, 디스크 전반적으로는 둠 메탈의 느낌이 다소 깔려 있기도 하다. 또한 반복적인 리듬이 강조되기도 하며 여기에 가상의 원시 인류 언어를 끼얹음으로써 오컬트적인 분위기를 극대화시켰다. 개인적으로 VAJRABHAIRAVA 삼부작까지는 To The Earth 못지않을 정도로 강렬하게 다가왔지만, 마지막 곡 Ol SONUF VAORESAJI!가 지나치게 길게 느껴진다는 점이 아쉬웠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이 부분은 앨범의 중~후반부, 즉 일반적으로 앨범에서 가장 늘어지기 십상인 부분인데 곡 자체도 늘어지는 감이 있어서 전체 앨범 완주의 큰 고비로 다가올 때도 있었다.
마지막 디스크 To the Sun의 첫 번째 곡 EÔS - Avènement de l’Éon Evaísthitozoïque Probocène Flamboyant에서 ÉOS는 그리스 신화 속 새벽의 여신 에오스를 의미한다. 제목의 나머지 부분은 인류 이후의 시대, 즉 Evaísthitozoïque라고 이름 붙여진 새로운 시대의 여명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곡은 18분이 넘어가는 장대한 분량 내내 느린 템포 속에서 진행되며, 리듬도 멜로디도 최소화된 드론 장르의 특색을 보여준다. 하지만 은은하고 웅장하게 울려 퍼지는 기타와 색소폰의 육중한 울림은 눈을 지그시 감고 명상하듯 듣는다면 지루함이 아니라 서서히 달아오르는 전율을 체험할 수 있게 해 준다. 특히 보컬이 등장하는 후반부에서 그 체험의 깊이가 최고조에 달하게 된다.
두 번째 곡 HEKA HOU SIA - Les Animaux Pensent-ils Comme on Pense qu’ils Pensent?에서 HEKA HOU SIA는 앞선 PTAH SOKAR OSIRIS처럼 각각 이집트 신화의 신들을 의미하며, 뒤이은 표현은 인간과 동물의 사고에 관한 벨기에의 과학철학자 Vinciane Despret의 의미심장한 질문을 담고 있다. 세 번째 디스크에서 유일하게 박진감 있는 트랙인 이 곡은 느낌상 첫 번째 디스크의 수록곡들과 유사하지만, 이 위치에 배치된 이유는 아무래도 느려진 흐름을 잠시 환기하고 다시금 흥미를 돋우는 효과를 보기 위함이 아닐까 싶다. 앞뒤의 두 곡만 도합 30분이 넘어가는 거대한 곡들이기에 이 곡처럼 보다 역동적인 트랙을 배치함으로써 청자의 집중력을 보완시켜 주는 것이다. 실제로 이 곡에서는 제법 캐치한 베이스라인이 돋보이기도 하고, 앞선 곡들에 비하면 다소 부담감이 덜하며 무난하게 진행된다. 물론 이 곡도 6분이 넘어가는 짧지 않은 곡이지만 직전 트랙 EÔS의 3분의 1 정도 뿐이기에 금방 끝나는 느낌을 준다.
세 번째 곡 HELIOZOAPOLIS - Les Criosphinx Sacrés d’Amon-Rê, Protecteurs du Cogito Ergo Sum Animal에서 HELIOZOAPOLIS는 Evaísthitozoïque처럼 CZLT에 의해 만들어진 단어로, 인류를 대체한 동물들이 만들어낸 도시를 의미한다. 뒤이은 대목은 자의식을 가진 동물의 수호자인 크리오스핑크스(양의 머리를 한 스핑크스)를 뜻한다. 앨범 전체의 클라이맥스라고도 할 수 있는 이 곡은 사이키델릭하면서도 이국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곡이다. 특히 인도의 전통 악기 시타르가 곡을 주도해 나가며 마치 영적 깨달음으로 인도할 것만 같은 명상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별다른 뜻 없이도 강렬하게 다가오는 보컬과 무게감 있고 나름의 짜임새를 지닌 전개 역시 흥미로우며, 곡 후반부의 시타르 솔로와 장중한 마무리는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마지막 곡 KHONSOU SOKARIS - We Are, We Were and We Will Have Been에서 KHONSOU(Khonsu)는 이집트 신화 속 달의 신이고, SOKARIS(SOKAR, Seker)는 사자(死者)들의 신이다. 이어지는 대목의 We가 지칭하는 바가 인류인지 아니면 인류를 대체한 동물들인지는 해석하기 나름이겠다. 참고로 We Are, We Were and We Will Have Been은 드론/둠 메탈 밴드 Bong의 앨범명에서 따온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이유는 CZLT가 이 앨범을 가장 좋아하는 작품 중 하나로 골랐을 뿐 아니라 Bong이라는 밴드 자체가 매우 저평가되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대장정을 마무리하는 이 곡은 타악기가 배제되고 오직 색소폰과 현악기만이 존재하는 곡으로, 마치 영화의 엔딩 크레딧 같은 느낌을 주는 곡이다. 마치 천천히 떠오르는 태양을 묘사한 듯한 곡으로 잔잔한 여운을 남겨 주며 앨범을 끝맺는다.
마지막 디스크 To the Sun은 CZLT에 의하면 일명 'Solar Drone Opera'라고 불리는 작품이다. 그 때문에 세 디스크 중에서도 독보적으로 드론 장르의 영향력이 가장 짙게 배어 있다. 깊은 명상에 어울릴 장대한 구성과 완만한 진행은 지그시 눈을 감고 명상을 하듯이 감상할 때 가장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개인적으로 Sunn O)))로 대표되는 드론 메탈 계열의 늘어지는 구성을 아주 선호하지는 않기 때문에 처음에는 이 디스크가 가장 지루하고 어렵게 느껴졌었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차분하게 명상을 하듯이 들어 보며 그 진가를 느낄 수 있었다. 특히 디스크 전체가 드론 사운드로 가득 찬 것이 아니라 두 번째 트랙 HEKA HOU SIA로 완급조절을 하며 지나치게 늘어지는 것을 방지하기도 하고, 세 번째 곡 HELIOZOAPOLIS에선 시타르의 연주가 찬란하게 빛을 발하며 앨범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하는 등 지루하게만 느껴지는 디스크가 아니었다.
세 디스크를 종합적으로 볼 때 이 작품은 먼저 리뷰하기도 했던 Spectral Lore와 Mare Cognitum의 Wanderers: Astrology of The Nine이나 Paysage d'Hiver의 Im Wald같은 대작들과 마찬가지로 올해 가장 주목할 만한 앨범 중 하나라고 말하고 싶다. 다만 이 앨범이 방금 언급한 두 작품과 비교했을 때 갖는 가장 큰 차이점 둘은 우선 첫째, 선뜻 어떤 장르의 음악이라고 부르기 어려울 정도로 여러 장르들이 뒤얽혀 있는 것이고, 두 번째는 한 번에 발매된 일종의 연작 앨범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일단 이 작품은 기본적으로 프리 재즈와 드론 및 여타 록 메탈 장르의 성격을 복합적으로 지니고 있는 작품이다. 여기에 세계 각국의 전통 음악 스타일도 담겨 있으며, 특히 시타르를 사용한 인도 음악의 느낌이 짙게 나타난다. 흔히 록/메탈 장르에서 타 장르와의 융합을 선보인 밴드들이 대개는 록과 메탈의 범주 안에서만큼은 벗어나지 않은 반면 이 앨범은 한 장르로 말하려는 시도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로 뒤섞여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점은 이 앨범이 삼부작 시리즈를 묶어서 한꺼번에 발매한 경향 때문에 더욱 도드라진다. 이는 마치 Blut Aus Nord의 777 삼부작을 한 세트로 발매한 느낌을 주는데, 사실 이러한 시도는 Swallow the Sun의 Songs from the North I, II & III 같은 경우에서 이미 등장한 적 있다. 하지만 이 앨범이 유독 특이하게 보이는 이유는 워낙 다양하고, 또 극단적이기도 한 장르들끼리의 조합이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블랙/둠 메탈과 같은 익스트림 메탈뿐 아니라 메탈 장르 내에서도 극단적으로 취향이 엇갈리는 드론 메탈에 프리 재즈의 무질서함과 각국의 전통 음악 및 이집트 신화부터 시작해 세계 곳곳의 문화적 색채가 모조리 녹아들어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특징과 두 시간이 넘어가는 방대한 분량 덕에 이 작품은 실로 친해지기 어려운 고난이도의 앨범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몇몇 부분이 엄청나게 마음에 들었다고 할지라도 다른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두 시간 넘는 시간 동안 앨범을 완주하는 것은 고역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과 친해지기 위해서 굳이 한 번에 완주하려 애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작품이 전체적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테마와 스토리를 지니고 있는 작품이기는 하지만 세 디스크의 특징과 매력이 워낙 제각각이고 전체 분량 또한 워낙 크기 때문에 각각의 디스크를 따로따로 듣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각각의 디스크에 서로 다른 제목이 붙어 있으며, 이는 단지 파트 구분을 위한 것이 아니라 개별 디스크가 독립적으로 하나의 앨범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는 점이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각 디스크의 마지막 곡들은 앨범을 마무리하는 느낌으로 끝을 맺으며, 한 디스크 내에서 곡들이 다음에 오는 곡들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과는 달리 디스크 사이에 위치한 곡들끼리는 비교적 단절된 느낌이 강하다.
이 앨범은 개인적으로도 쉽게 다가왔던 작품은 아니었다. 물론 첫인상은 상당히 강렬하게 다가왔었지만, 중간중간 늘어지는 부분과 지나치게 난해하게 느껴졌던 부분 탓에 익숙해지는 데 상당히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좋았던 부분은 워낙 좋기도 했고 또 묘한 중독성이 있기도 해서 계속 찾아 듣다 보니 점차 더욱 인상적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앞서 언급한 디스크별로 나눠 듣는 방법도 나름대로 도움이 된 것 같다. 물론 지금도 두 시간이 넘어가는 분량에 부담감을 전혀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 작품은 시간을 들여 친숙해질 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여태껏 이 글에서 조금이나마 이해를 돕기 위해 각각 곡들의 소재 같은 것들을 줄줄이 써 놓았지만 사실 이 작품을 즐기기 위해서 그러한 것들이 필수적인 것은 전혀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앨범은 대부분이 즉흥 연주를 통해 만들어졌으며, 가사 또한 원시 인류가 사용했을 법한 가상의 언어로 이루어진 것을 봐도 알 수 있듯 이 앨범을 즐기기 위해서는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다시 말해서 이 앨범은 어떤 장르이고 어떤 스타일이고 연주가 어떻고 등등을 굳이 분석할 이유가 없다. 청자는 단지 흐름에 몸을 맡기고 하나의 정신적 체험으로서 이 거대한 괴작을 온몸으로 느껴보는 것이 이 작품을 즐기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CZLT가 언급한 Homo-Sensibilis, 즉 ‘나는 느낀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의 개념과도 일맥상통한다.
이에 대해 ‘그럼 뭐 하러 이렇게 길게 써 놨느냐?’라고 질문할 수 있겠는데 서두에서 잠깐 언급했던 것처럼 작품의 소재, 테마 등등에 관해 서술한 것은 조금이나마 앨범에 대해 앎으로써 작품을 보다 깊게 느낄 수 있게 하거나 앨범을 들으며 떠오르는 의문을 쉽게 해결하기 위해서이다. 다시 말해 개인적인 감상과 해석을 공유함으로써 작품에 대한 감상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했음이 개인적인 의도였다고 말하고 싶다. 더 나아가 이러한 괴작을 탄생시킨 CZLT와 그의 독특한 사상과 예술혼에 대해 말해 보는 기회를 갖기도 한 것이다.
Alejandro Jodorowsky는 1968년 멕시코의 아카풀코 영화제에서 자신의 영화 Fando y Lis 를 상영했다가 자극적인 장면에 분노한 관중들이 폭동을 일으켜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고, 이후로도 영화 촬영 당시 멕시코 정부로부터 탄압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날 그는 컬트 영화의 거장이자 위대한 영화감독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John Lennon과 Marilyn Manson 등 영화계 밖의 유명 아티스트들도 그의 열렬한 팬이었다. 이렇게 Jodorowsky의 이름을 언급한 이유는 다름 아닌 밴드의 리더 CZLT 또한 그의 추종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단지 Jodorowsky의 영화를 좋아할 뿐 아니라 타로 카드의 권위자이기도 한 Jodorowsky의 타로 카드를 매일 연습한다고 말할 정도로 그에게 깊은 존경을 표했다. 마찬가지로 서두에서 언급한 Kenneth Anger의 Lucifer Rising 또한 오컬트적인 요소가 매우 깊게 담겨 있는 도발적인 작품이며, 이 영화의 클립이 Neptunian Maximalism의 홍보 영상에 사용되기도 했다.
Jodorowsky는 2007년 방한 당시 인터뷰에서 영화 촬영 당시 겪었던 멕시코 정부의 탄압에 관한 질문에 “양보를 선택한 순간 예술가는 예술가가 아니다. 만약 양보를 했다면 예술영화가 아니라 보통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상업영화가 됐을 것이다. 예술이 아닌 상업성을 지닌 영화가 나왔을 것이다. 피카소가 개성을 지켰기 때문에 오늘날 이름을 널리 알렸던 것이다.”라고 답했다. 또한 자신의 영화가 어렵다는 질문에 대해서는 “영화는 영화 자체니까. 이해하기 어렵다면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보는 대로 느끼지 않고 ‘어렵다’고 주관적인 평가를 내리는 건 옳지 않다.”라고 말하며 자신이 영화를 만든 것은 명성을 위해서가 아닌 예술가 그 자체로서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Neptunian Maximalism의 음악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들의 음악이 낯설고 어렵게 느껴진다고 해서 애써 이해하려 노력할 필요는 없다. 그저 흐름과 분위기에 몸을 맡기다 보면 어느 순간 이 작품의 매력에 매료되는 순간이 다가올 것이다. 이때 이 앨범이 주는 감흥은 마치 명상을 하다 하나의 깨달음을 얻는 것처럼 깊은 정신적 체험으로 기억될지도 모른다. 이와 같은 독보적인 음악의 탄생은 CZLT와 동료들이 남들을 의식하지 않고 어떠한 구속도 없이 마음껏 예술혼을 발현함으로써 탄생하게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Neptunian Maximalism은 조만간 다시 스튜디오로 돌아가 음악 작업에 착수할 것이라고 밝혔고, 코로나 사태가 진정되는 대로 다른 밴드들과 함께 투어를 진행할 계획이라고도 말했다. 그뿐 아니라 CZLT는 원맨 블랙 메탈 프로젝트를 비밀리에 진행 중이고, Neptunian Maximalism의 다른 멤버들과 만든 또 다른 사이드 프로젝트를 이어가는 등 활발한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앞으로도 이들의 기이하지만 자유롭고 독창적인 음악의 세계가 더욱 넓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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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rmorant –
Metazoa (2009) |
(100/100) Aug 31, 2020 |

인디 밴드로 성공하는 법?
캘리포니아의 인디 밴드 Cormorant는 본래 스래쉬 메탈 밴드에서 활동했던 드러머 Brennan Kunkel과 베이시스트 Arthur von Nagel에 의해 결성되었다. 이들은 이후 Brennan의 고교 동창이었던 기타리스트 Nick Cohon을 영입하여 2007년 첫 EP The Last Tree를 발표했고, 그 뒤 Enslaved의 공연장에서 만나게 된 Matt Solis를 영입하여 2009년 첫 번째 정규 앨범 Metazoa를 발표했다. 이 앨범이 몇몇 메탈 사이트나 웹진에서 호평을 받은 이후 이들은 2017년 Diaspora에 이르기까지 총 네 장의 정규 앨범을 발표했다. 밴드명 Cormorant는 가마우지를 뜻하며, 실제로 밴드의 출신 지방에서 서식하는 새이다. 이 이름은 자연과 인류 문명의 공존을 표현하기 위해 선택한 것이라고 한다.
이 밴드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어떠한 음반사에도 소속되지 않고 철저히 인디 밴드로서 음반 작업, 판매, 공연 등을 직접 진행해왔다는 점이다. 보통은 초기에 인디 밴드로 시작했다가 소속사의 눈에 들어 계약을 하는 등의 여러 방식으로 음반사에 소속되는 경우가 많지만, 이들의 경우 음반사들의 제의를 거절하고 끝까지 인디 밴드로서의 정체성을 지켜나갔다. 이러한 전략은 나름대로 성공적이었다. 이들은 2집 Dwellings 발매 당시 팬들과 밴드가 직접 접촉하는 예약 구매 계약을 통해 앨범의 제작 비용을 충당하기도 했다. 물론 멤버들 모두 저마다의 정규직에 종사하고 있기는 하지만, 지속적인 음악 활동을 하기 위해 드는 비용은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기에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대책을 활용했던 것이다. 또한 이러한 방식은 팬서비스 차원에서도 보다 용이했는데, 그 예로 이들은 2집 Dwellings부터 디지팩 내부에 후원해준 팬들의 이름을 전부 적어 넣어 감사의 인사를 전하기도 했다. 또한 이들은 페이스북 등의 소셜 미디어를 통해 팬들과 직접 소통하는 등 팬들과의 원만한 관계도 지속적으로 이어갔다.
이들은 발매한 CD를 전부 자체 제작하여 세계 각국으로 배송하기도 했는데,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2집 Dwellings 발매 당시 이들은 베이시스트 Arthur von Nagel의 어머니네 집에서 음반 제조 작업을 거친 뒤 분배 및 배송을 위해 3일 내내 우체국에서 살다시피 하기도 했다는데, 멤버들이 전부 저마다의 정규직에 종사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작업을 하기란 보통 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또한 LP의 경우 CD보다 훨씬 큰 비용을 요구했기 때문에 LP 발매는 자체적으로 하지 못한 채 밴드의 숙원사업으로 남아 있다가 2015년 핀란드의 레이블 Blood Music을 통해 1~3집 LP를 동시에 발매할 수 있었다. 그리고 2017년 발매된 4집 Diaspora는 마침내 CD뿐 아니라 LP도 자체 제작하여 발매하기도 했다.
한편 간섭할 사람이 없는 인디 밴드의 특성상 이들은 멤버들 모두의 의견을 공유하며 자유롭게 자신들이 만들고 싶은 음악을 만들어 갔다. 비록 1~2집의 가사는 전부 베이시스트였던 Arthur von Nagel가 작사했고, 그가 2012년에 탈퇴한 이후로는 다른 멤버들이 따로따로 각각 곡의 작사를 담당했지만, 음악 자체는 거의 모두가 네 멤버들 전원이 합심하여 작곡한 결과물이었다. 실제로 Metazoa의 수록곡들 중 마지막의 짤막한 연주곡 Voices of the Mountain을 제외하곤 전부 네 멤버가 공동으로 작곡한 곡으로 표기되어 있다.
어쨌거나 이들이 거둔 소소한 성공의 뿌리가 되는 계기는 이번에 리뷰할 작품 Metazoa에 그 뿌리를 둔다고 볼 수 있겠다. 이들은 자신들의 음악을 ‘Tiberian ass-bastard folk’라고 부르는데 이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기보다는 그만큼 이들의 음악을 하나의 장르로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채로운 색깔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에서 농담조로 붙인 표현이라고 한다. 첫 번째 앨범 Metazoa는 뚜렷하고 캐치한 멜로디가 돋보이는 프로그레시브 멜데스와 유사하고, 이후의 앨범들은 좀 더 블랙 메탈의 색채가 녹아들어 있지만 전반적으로 이들의 음악은 Opeth같은 밴드와 마찬가지로 특정 장르의 스테레오타입에서 벗어난 독자적인 스타일을 구축했다고 볼 수 있다.
눈길을 사로잡는 독특한 앨범 커버 및 디자인 역시 이들의 뚜렷한 개성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겠다. 특히 2집 Dwellings의 커버는 2012년 Metalstorm 유저들이 선정한 역대 최고의 앨범 커버로 손꼽히기도 했다. 1집 Metazoa의 커버와 디지팩 디자인 역시 뛰어난 미적 감각이 돋보였다. 또한 이 앨범의 프로듀싱은 Neurosis, Sleep, Agalloch 등의 앨범 제작에 참여했던 베테랑 엔지니어 Billy Anderson이 담당했는데, 그와의 작업 당시 밴드 멤버들의 만족도가 매우 높았다고 한다. 의도적으로 거친 면모를 부각하면서도 때로는 부드럽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며 이들의 독특한 개성을 잘 살려냈다.
앨범의 제목 Metazoa는 후생동물, 즉 하나의 세포로 이루어진 원생동물을 제외한 모든 동물, 다시 말해 다세포동물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이러한 제목은 자연과 동물들에 대한 이 앨범의 테마와 어울리는 단어로서 밴드가 선택했다고 한다. 작사를 담당한 Arthur von Nagel는 문학과 철학을 좋아하며 한때 시인을 꿈꾸기도 했다고 한다. 때문에 이 앨범의 가사들은 다분히 시적이고 상징적인 면모가 두드러진다. 또한 각각의 곡들 속에서 동물이 등장하며 이러한 동물들이 가사 속에서 중요한 위치를 지닌다고 한다.
Arthur von Nagel에 따르면 이 앨범은 본래 컨셉 앨범을 의도하고 기획된 것이 아니지만 우연히 같은 테마를 공유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그는 수 년에 걸쳐 각기 다른 상황 속에서 가사를 써 내려갔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7번 트랙 Hole in the Sea의 가사는 그가 유럽에서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잠을 자지 못해 비몽사몽한 상태에서 일출을 바라보며 쓴 것이고, 8번 트랙 The Emigrant’s Wake의 가사는 어릴 적 뛰어놀던 바닷가를 어른이 되어 다시 찾아가 보니 어린 시절 느꼈던 환상적인 기억이 아니라 하찮고 보잘것없음만을 느꼈던 괴리감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또한 그는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하여 가사를 쓰기도 했는데, 2번 곡 Uneasy Lies the Head는 프랑스 대혁명기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를 다룬 곡이며, 4번 곡 Blood on the Cornfields는 1831년 미국에서 벌어졌던 흑인 노예 냇 터너의 반란에 대한 곡이다. 또한 곡들이 서로 연계성을 지니고 있는 경우도 있는데, 첫 번째 곡 Scavengers Feast는 생물의 사체가 먹히고 분해되면서 자연을 더욱 번성하게 만든다는 내용을 다루며, 짤막한 연주곡을 제외하면 사실상의 마지막 곡인 Sky Burial은 티베트 등지에서 행해진 조장(鳥葬)풍습을 다룬다. 이는 처음과 끝을 장식하는 이 두 곡의 배치를 통해 죽고 난 뒤 다른 생물들에게 먹힘으로써 다시 자연으로 되돌아가고 이를 통해 삶의 순환이 계속되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앨범의 첫 번째 곡 Scavengers Feast는 앨범의 특색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킬링 트랙이다. 뚜렷한 멜로디 라인들로 단번에 강렬한 첫인상을 남겨 주며, 부드러운 멜로디와 마치 초기 Opeth를 떠올리게 하는 거칠고 투박한 스타일이 어우러진다. 특히 중반부의 유려한 멜로디라인과 후반부에서 기타 솔로로 이어지는 곡의 클라이맥스는 이 곡을 처음 들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언제 들어도 좋은 부분들이라고 말하고 싶다. 비록 하쉬 보컬이 낯설게 느껴질 수 있지만, 보통 익스트림 계열 보컬들이 그렇듯 좀만 적응되면 무난히 즐길 수 있는 타입이라고 생각한다.
묵직한 인트로 이후 캐치한 멜로디로 리듬을 타게 만드는 두 번째 곡 Uneasy Lies the Head는 좀 더 변칙적인 전개를 보여준다. 키보드와 클린 보컬 코러스가 더해져 다채로운 느낌을 더하고, 곡 후반부에선 고조된 분위기 속에서 멋지게 곡을 마무리했다. 추가로 지나치게 곡을 억지로 늘이지 않고 알짜배기만 간추린 느낌을 주기도 했다.
클린 보컬과 클린 톤 기타로 서정적인 분위기를 내며 시작하는 Salt of the Earth도 직전 곡처럼 조금 더 프로그레시브한 면모가 드러나는 곡이다. 물론 이 곡에서도 뚜렷하고 매력적인 멜로디라인을 찾아볼 수 있으며, 이 앨범만의 독특한 분위기 또한 잘 드러나고 있다. 특히 중후반부의 변칙적인 분위기 전환이 기억에 남았다.
도입부부터 캐치한 멜로디로 귀를 사로잡는 Blood on the Cornfields는 1번 트랙과 함께 이 앨범에서 가장 선호하는 곡이다. 굴지의 멜데스, 프록 밴드들과 비교해 보더라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매력 넘치고 귀에 쏙쏙 박히는 멜로디와 동시에 뚜렷한 개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군더더기 없이 말끔하게 이어지는 구성을 선보인 훌륭한 곡이었다.
다섯 번째 곡 Hanging Gardens는 11분대의 대곡이며, 첼로가 등장하는 등 보다 쓸쓸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이후로는 격렬함과 잔잔함을 오가는 전개로 곡을 이어나가며 마치 외줄 타기 곡예를 부리는 듯 예측하기 어려운 독특한 구성을 선보인다. 비록 갑작스럽게 등장한 대곡이다 보니 약간 흐름이 끊기거나 루즈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곡 자체적인 완성도는 역시 출중한 곡이었다. 특히 곡 중후반부의 역동적이고 비장미가 느껴지는 부분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반면 여섯 번째 곡 The Crossing은 3분대의 짧고 강렬한 곡으로 청자를 좀 더 집중하게 해 준다. 적당히 빠른 템포 속에서 간결하게 진행되지만 그 속에서도 훌륭한 리프와 멜로디라인이 돋보이는 감초 같은 트랙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한편 Cormorant와 마찬가지로 샌프란시스코 동향 밴드이자 친구이기도 한 Giant Squid의 보컬 Aaron John Gregory의 독특한 보컬 스타일을 보여주며 시작하는 Hole in the Sea는 Cormorant의 드러머 Brennan Kunkel의 누이 Deborah Spake의 피쳐링 또한 담겨 있는 곡이다. 이 곡 또한 프로그레시브하고 독특한 스타일과 분위기가 인상적인 곡이며, 폭발하듯 크게 터져 나오는 곡 후반부의 비장한 클라이맥스가 인상적인 곡이었다.
Hanging Gardens에 버금가는 대곡 The Emigrant's Wake는 마찬가지로 다채로운 전개가 펼쳐지는 곡이자, 훌륭한 리프들이 담겨 있는 후반부의 킬링 트랙이다. 특히 후반부에서 클린 보컬이 등장하며 서서히 최고조로 달아오르는 분위기는 앨범의 구성 면에서 절정이라고 부를 만한 훌륭하기 그지없는 순간이었다.
클린 보컬 위주로 진행되는 Sky Burial은 마지막으로 분위기를 한번 더 끌어올렸다가 서서히 하강하는 듯한 분위기 속에서 마무리되며 앨범을 끝맺을 준비를 하는 곡이다. 그리고 이는 마지막 곡 Voices of the Mountain으로 이어져 은은한 분위기 속에서 여운을 남기며 깔끔한 앨범의 마무리를 보여주었다.
전체적으로 다소 거칠게 느껴졌던 레코딩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훌륭한 멜로디와 다채로운 구성, 그리고 독특한 분위기가 돋보였던 작품이었다. 앨범을 처음 접했을 때 Scavengers Feast와 이어지는 초반부의 킬링 트랙들에 단번에 빠져들었었는데 이러한 감흥은 지금도 유효할 정도로 아주 인상적이었다. 물론 처음엔 보컬이 다소 낯설게 다가오기는 했고, 지금도 완벽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보컬 때문에 이들의 음악을 지나치기엔 이들의 독특한 스타일과 분위기가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다. 단순히 프로그레시브한 멜로딕 데스의 면모를 넘어 고전적인 헤비 메탈과 포크적인 면모 등등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장르의 틀에서 벗어나 자기들만의 음악을 보여줌으로써 청자에게 뚜렷한 각인을 시켜 준 것이다.
이처럼 정규 데뷔작부터 놀라운 수준의 음악을 보여주었던 이들은 Opeth 이후 가장 실력 있고 개성 있는 메탈 밴드 중 하나였다고 봐도 무방할 듯싶다.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이 Ne Obliviscaris의 데뷔작 Portal of I에 견줄 만한, 혹은 그 이상으로 훌륭한 앨범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이 앨범 이후 2년여 뒤에 발매된 Dwellings를 발표했고, 역시나 성공적인 반응을 얻어내며 언더그라운드 메탈 씬에서 그 입지를 다져갔다. 그리하여 이들은 Primordial, Yob 같은 베테랑 선배 밴드와 함께 투어를 돌기도 했으며, Vektor나 Wolves in the Throne Room과 같은 무대에 서거나 심지어는 메탈과는 접점이 없는 블루스 밴드와 공연을 하기도 하는 등 다양한 경험을 쌓아나갔다. 한편 2012년 보컬/베이스를 맡던 Arthur von Nagel이 게임 제작사 Telltale Games에 품질 보증 담당으로 일하게 되면서 어쩔 수 없이 음악 활동을 그만두게 된 이후로도 Cormorant는 새 멤버와 함께 꾸준히 활동해 왔었다.
하지만 작년 11월, 이들은 무기한 활동 중단을 선언했다. 불행 중 다행히도 그 원인은 멤버 간 불화나 견해 차이가 아닌 직업과 생활 등의 보다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었다고 한다. 또한 언젠가 활동을 재개할 가능성을 열어 두었고, 무엇보다도 멤버들 중 세 명이 Ursa라는 둠 메탈 밴드를 결성하여 몇 달 전에도 정규 2집 신보를 발매한 만큼 이들의 음악 활동은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 요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비록 Cormorant는 현재 12년간의 활동 끝에 활동을 중단했지만, 그들이 걸어온 길과 거두어낸 성과는 인디 뮤지션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될 만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소속사의 간섭 없이 자유롭게 음악을 만들어 가면서도 현실 세계에서의 삶과 음악 활동 간의 밸런스를 맞추고 책임감 있게 활동해 왔던 밴드라고 평하고 싶다. 또한 인디 밴드로서의 이점을 이용한 적극적인 팬서비스와 멤버 간 불화나 사건·사고도 없이 원만한 활동을 이어갔다는 점 역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겠다.
또한 Bandcamp의 대두로 인해 이들의 활동은 더욱 원활하게 이어질 수 있었고 이는 실제로 멤버들이 인터뷰에서 언급한 내용이기도 하다. 이들은 현재 마지막 앨범 Diaspora를 제외한 디스코그래피 전체의 음원을 Bandcamp에서 무료로도 다운로드 받을 수 있게 설정해 놓은 만큼 이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닌 자기만족과 팬서비스를 위해 음악활동을 이어갔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들이 2집 발매 이전 당시에 Metazoa의 음원을 유료 다운로드만 할 수 있게 해놓았다가 잠시 동안 무료 다운로드가 가능하도록 바꿔놓았던 적이 있는데, 이 기간에 평소보다 10배나 많은 수익을 ‘기부금’으로서 얻었다고 한다. 이처럼 이들은 Bandcamp라는 플랫폼을 이용해 팬들로부터 직접 후원금을 받음으로써 밴드는 팬들의 후원금으로 고마움과 만족을 느끼며 음악활동을 지속할 수 있고, 팬들은 중간 간섭 없이 곧바로 밴드를 응원하며 때때로 작은 보답을 받을 수도 있는 일종의 호혜 관계를 구축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Cormorant가 거두어낸 성과는 어차피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기 어렵다는 것을 전제로 한 대신 밴드와 팬이 서로에게 만족감과 행복을 안겨 주는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작지만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음악을 하고 싶지만 하고 싶은 음악이 ‘비주류’라 돈을 벌 수 없다고 생각해 꿈을 포기한 사람들에게 어쩌면 Cormorant 같은 밴드의 작은 성공이 귀감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Bandcamp와 같은 플랫폼의 발달과 인터넷의 확산은 지구 반대편에 있는 이름 모를 음악가의 작품조차 발매 당일 곧바로 접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때문에 이제는 능력만 있다면 얼마든지 자신의 예술 작품을 전 세계에 공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할지라도 주목을 받기란 쉬운 일이 아니고, 현실 세계에서의 삶을 유지하며 창작 활동을 하는 것은 더더욱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Cormorant는 뛰어난 능력과 열정, 그리고 현실 세계에서의 삶과 음악 활동의 밸런스를 유지하며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그들에게 훌륭한 예술가로 기억될 수 있었다. 이러한 사례는 당연히 Cormorant만의 전유물이 아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아티스트들이 자신의 작품을 인터넷을 통해 공유하며 세계 각지에서 작지만 분명한 팬들을 만들어 가고 있다. 이제는 예술가가 반드시 상업적으로 큰 돈을 벌고 유명해져야만 성공한 것은 아니다. 단 한 사람만이라도 그 작품의 진가를 알아봐 주고 그에 따른 자기 만족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성공한 예술가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렇기에 Cormorant는 세계 각지의 적지만 충성스러운 팬들에게 성공한 인디 밴드로서 기억되고 있는 것이다.
98/100 ... 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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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ysage d'Hiver –
Im Wald (2020) |
(95/100) Jul 31, 2020 |

사람을 살리는 블랙 메탈
Burzum 이후 가장 영향력 있는 원맨 블랙 메탈 아티스트를 거론할 때 Paysage d'Hiver의 Wintherr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스위스 출신인 그의 본명은 Tobias Möckl이며, 원맨 밴드 Paysage d'Hiver에서 Wintherr로, Darkspace에서는 Wroth라는 예명으로 90년대 후반부터 활동해오고 있다. 먼저 시작했던 원맨 밴드 Paysage d'Hiver에서는 블랙 메탈과 엠비언트를 오가는 스타일을 구사하고, 밴드명 그대로 ‘겨울 풍경’(Paysage d'Hiver의 프랑스어 뜻)을 묘사하며 독자적인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때로는 거센 눈보라와도 같은 모습을, 다른 한편으로는 조용히 눈 내리는 깊은 숲 속의 밤 같은 면모를 보여주는 그의 스타일은 그의 다른 밴드 Darkspace의 뿌리가 되면서 많은 앳모스퍼릭 블랙 메탈 밴드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한 가지 특이할 점은 지금까지 그의 디스코그래피는 전부 데모/스플릿 앨범만 존재해 왔다는 것이다. 때로는 무려 80분에 달하는 긴 구성의 앨범을 발표하면서도, 그것들은 전부 데모로서 불리어 왔다.
그리고 2020년, 그가 활동을 시작한 지 23년 만에 마침내 첫 번째 정규 앨범 Im Wald가발표되었다. 이 작품은 2CD, 4LP 구성에 장장 2시간에 달하는 장대한 규모를 자랑했지만, 정식 발매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 지난 1월 25일, Wintherr는 소수의 팬들을 대상으로 곧 발매될 Im Wald의 비공개 감상회를 진행했었고, 참석한 이들에게 Im Wald의 디지털 음원을 USB 메모리에 담아 나눠 주었다. 하지만 얼마 뒤 Im Wald의 음원은 인터넷에 유출되었고, 그 경로는 오직 USB 메모리에 있던 파일을 누군가 인터넷에 업로드한 경우일 것이라고 Wintherr는 밝혔다. 여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코로나-19 사태가 유럽을 강타하면서 본래 2~3월 발매 예정이던 Im Wald는 지난 6월 26일에야 발매될 수 있었다. 게다가 기존 앨범 발매 당시 이용하던 업체가 코로나 사태로 인해 문을 닫으면서 Wintherr는 디지팩 제조 과정 및 포장까지 손수 하나하나 진행해야 했다.
그리하여 우여곡절 끝에 발매된 이 작품은 Paysage d'Hiver의 여정의 또 다른 일부에 해당한다. 지금껏 발매된 모든 Paysage d'Hiver의 음악들은 한 인물, 즉 Wintherr 본인 내적 자아의 여정 속 각각의 단편에 해당하며, 이번 작품 역시 예외는 아니다. 예를 들어 98년도에 발매된 Steineiche와 Schattengang은 여정의 시작 부분에 해당하고, Das Tor (2013년), Kerker (1999년), 그리고 Die Festung (1998년)은 여정의 끝 부분에 해당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번 작품 Im Wald는 그 앨범들의 중간에 위치한 작품이라고 Wintherr는 밝혔다.
앨범의 첫 번째 곡 Im Winterwald는 여느 때처럼 겨울의 바람소리로 시작하며, 곧이어 특유의 거칠고 격렬한 블랙 메탈 사운드로 팬들의 오랜 기다림에 부응해 준다. 특유의 눈 덮인 설산 내지는 숲에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묘사한듯한 거친 스타일은 여전하며, 이전 작품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깔끔해진 레코딩을 보여주었다. 이는 이 앨범에서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변화라고 할 수 있는데, 200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철저하게 의도적으로 거친 음질을 고수한 반면 이번 작품에서는 상당히 깔끔해진 느낌을 준다. 사실 이러한 변화는 2017년 자국 스위스의 밴드 Nordlicht과 발표한 스플릿에 수록된 곡 Schnee (III)에서 먼저 발견할 수 있었다. 때문에 이러한 변화가 갑작스러운 것임은 아니라는 것을 먼저 이야기할 필요가 있었기에 일찌감치 언급한 것이다.
아무튼 Im Winterwald는 거칠고 격렬하지만 비장하고 서정적이기도 한 Paysage d'Hiver만의 독보적인 분위기를 단번에 증명해 준 곡이다. 곡 후반부에서는 더욱 몽환적인 연출을 보여주기도 하는 등 10분 가까운 대곡을 반복적이지만 지루하지 않게 풀어 나갔다.
이어지는 Ueber den Baeumen도 마찬가지로 Paysage d'Hiver의 전매특허 분위기 및 비장미 넘치는 트레몰로 리프로 강렬한 인상을 남겨 준다. 곡이 뚜렷한 기승전결의 흐름을 지니고 있으며, 상당히 캐치한 리프가 등장하기도 한다. 후반부에서는 Darkspace를 연상시키는 장중함을 더해 그 위력을 더했다.
세 번째 트랙 Schneeglitzern은 앰비언트 위주의 조용하고 잔잔한 곡이다. 차디찬 바람 소리와 은은히 울리는 멜로디로 청자를 한겨울의 깊은 숲속으로 보내버리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다시금 무자비한 겨울의 폭풍을 묘사하는 네 번째 곡 Alt역시 청자를 압도하는 기막힌 분위기를 연출해내며 장르적 쾌감을 선사해 준다. 특히 사정없이 몰아치는 전개 속에서도 은은한 멜로디가 공존하며 독특한 서정미를 만들어 내는 것이 실로 오묘한 매력을 보여준다.
다시 한번 잠깐 쉬어가는 Wurzel 이후 이어지는 Stimmen im Wald에선 클린 보컬 코러스를 이용해 더욱 환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또한 일부 부분에서는 보컬 스타일에 변화를 주기도 하는 등 이 곡만의 특색과 앞선 곡들부터 이어져 온 분위기가 공존하며 색다른 느낌을 준다.
7번 곡 Flug은 잔잔하고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천천히 진행되며 쉬어 간다는 느낌의 곡이다. 하지만 앞서 등장한 쉬어 가는 트랙들에 비해 훨씬 긴 곡이기 때문에 지루함을 느낄 수도 있지만, 조금씩 쌓아 가는 나름대로의 매력을 지닌 곡이기도 하다.
다음 곡 Le rêve lucide에선 다시금 거친 분위기로 돌아가며 역시나 거칠고 격렬한 전개를 보여 준다. 이 곡에선 처연함을 더하는 현악기의 선율이 더해지기도 하는 등 99년도의 셀프 타이틀 데모의 수록곡 Welt aus Eism를 떠올리게 하는 약간 더 쓸쓸한 느낌을 주기도 했다. 곧이어 짤막하고 잔잔한 Eulengesang가 뒤를 잇는다.
열 번째 트랙 Kaelteschauer도 마찬가지로 거친 전개 속에서의 비장미를 맛볼 수 있으며, 앞선 2번 트랙처럼 장중함이 더해진 스타일이 인상적이다. 마치 Darkspace의 곡들이나 01년도의 데모 Winterkälte처럼 청자를 거세게 압박하는 분위기를 준 앨범 후반부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곡이다.
마지막으로 쉬어가는 곡 Verweilen 이후의 Weiter, immer weiter는 여전히 거칠지만 상대적으로 좀 더 은은하고 무게감 있는 곡이다.
대미를 장식하는 최후의 대곡 So hallt es wider는 장장 20여 분에 달하며 2시간에 달하는 대작의 마무리에 어울리는 장중함이 더해진 곡이다. 다만 곡과 앨범 모두 워낙 길다 보니 이쯤 되면 집중력이 흐려질 수도 있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물론 곡 자체의 완성도만 놓고 보면 빼어나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서서히 연착륙을 하는 듯한 마무리가 인상적이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 앨범은 이전까지 보여준 Paysage d'Hiver의 스타일을 충실히 따라가는 듯하면서도 상당한 차이점 또한 찾아볼 수 있는 작품이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앞서 언급한 ‘깔끔한’ 레코딩일 것이다. 이전까지 아날로그 레코딩 방식을 고수해오던 Wintherr는 2017년 발표했던 Nordlicht과의 스플릿에 수록된 Schnee (III)에서 최초로 디지털 레코딩 방식을 시도했고, 전에 비해 보다 깔끔한 스타일을 보여주었다. 이번 신작 Im Wald 역시 지금까지의 Paysage d'Hiver의 음악들 중 가장 말끔한 사운드를 지니고 있다.
레코딩이 깔끔해지는 것이 뭐 그리 중요하게 먼저 다룰 문제냐고 의문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블랙 메탈 장르 내에서 현대적이고 말끔한 레코딩의 여부는 꽤 중대한 문제로 다뤄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고전적인 세컨드 웨이브 블랙 메탈의 명반들이 지닌 투박하고 거친 레코딩이 오히려 블랙 메탈 팬들에게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처럼, Paysage d'Hiver의 음악 역시 의도적으로 거칠고 날것의 레코딩을 추구함으로써 그 분위기를 더욱 배가시키기도 했었다. Schnee (III)이전까지는 철저하게 8트랙 테이프 레코더를 사용해 작업을 진행했던 그는 오래된 레코더가 결국 망가지면서 컴퓨터로 작업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이러한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전적으로 듣는 사람에 달려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해 하나의 정답을 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앨범의 깔끔한 음악에 예전 스타일에 대한 향수를 느낄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더욱 듣기 편하고 진화된 사운드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후자의 의견에 가깝지만, 1999년의 전설적인 셀프 타이틀 데모 Paysage d'Hiver와 같은 투박함의 매력을 그리워하는 의견 또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Wintherr본인도 아마 이 문제에 대해 상당히 깊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이전에도 이미 디지털 레코딩 방식을 경험해 보았지만, Schnee (III) 녹음 작업 당시 컴퓨터 기술과 자신의 내면이 담긴 Paysage d'Hiver의 음악을 조화시키는 것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렇기에 Im Wald는 분명히 깔끔한 레코딩을 보여주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Paysage d'Hiver의 기존 스타일을 기준으로 한 것이며, 통상적으로 보면 여전히 특유의 거칠고 격렬한 스타일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는 보다 듣기 편한 방식을 추구하면서도 기존 팬들이 실망감을 느끼지 않게 하려는 나름대로의 전략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특히나 이 앨범이 무려 2시간에 달한다는 사실 또한 거친 레코딩이 주는 피로감을 완화하기 위해 보다 깔끔한 레코딩을 선택한 것을 추측해 볼 수도 있다. 실제로 1~2 곡마다 등장하는 짤막한 엠비언트 트랙들은 격렬한 블랙 메탈의 연속에 따른 피로감의 누적을 완화시켜주는 효과를 발휘하고 있기도 하다.
작곡 측면에서 보면 변화한 점도 더러 있지만 여전히 Paysage d'Hiver의 정체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2017년 Nordlicht과 발표한 스플릿에 수록된 Schnee (III)에서 기존 스타일을 바탕으로 하되 상당히 캐치한 리프와 모던 블랙 메탈에서나 볼 법한 전개를 더하며 신선한 충격을 주기도 했었는데, 이것이 Im Wald의 전조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했다.
Paysage d'Hiver의 아이덴티티라고 할 수 있는 차디찬 칼바람 소리와 이어지는 블래스트 비트와 트레몰로 피킹, 그리고 Wintherr의 절규는 Im Wald에서도 여실히 드러나지만, 깔끔해진 레코딩 이외에도 이전과는 다소 다른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우선 전체적으로 곡들의 길이가 짧아진 편이다. 물론 잠깐잠깐 쉬어가는 짤막한 트랙들을 제외하고 평균 10분 이상의 대곡을 지향하는 것은 여전하지만, 셀프 타이틀 데모 앨범이나 Winterkälte, Das Tor의 수록곡들에 비하면 다소 짧아진 느낌이 있다. 이러한 구성은 두 시간에 달하는 앨범에 보다 많고 다양한 곡들을 담아 좀 더 다채로운 맛을 내고 흐름이 지나치게 늘어지는 경우를 막는 효과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또한 상대적으로 짧은 곡을 통해 각각 곡들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고 보다 쉽게 친숙해질 수 있게 하는 효과를 주기도 했다.
각각의 곡 구성에 있어서도 기존 스타일과는 다소 차이를 보이는데, Im Winterwald나 Ueber den Baeumen의 비장미가 느껴지면서도 캐치한 리프들은 Schnee (III)에서 예고한 변화의 연장선이라고 불러도 좋을 듯하다. 특히 2번 곡 Ueber den Baeumen같은 경우 뚜렷한 기승전결의 흐름을 갖추며 보다 접근하기 쉬운 면모를 보여준다. 이러한 특징은 단지 이 곡들만 아니라 수록곡들 전반에 걸쳐 나타나며, 자연히 이 앨범의 특성이 된다. 클린 보컬 코러스를 비롯해 다양한 보컬 스타일이 등장하는 Stimmen im Wald 역시 이번 작품의 새로운 시도가 두드러지는 곡이다.
요약하자면 이 앨범은 2시간에 달하는 대작이지만 어떻게 보면 Paysage d'Hiver의 디스코그래피를 통틀어 가장 접하기 쉬운 작품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상대적으로 깔끔해진 레코딩과 평균적으로 다소 짧아졌지만 뚜렷한 곡 구성으로 진입장벽을 낮추되 Paysage d'Hiver만의 확고한 개성 또한 여전히 지켜나간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작품은 Paysage d'Hiver의 독보적인 개성을 다시 한번 보여주면서도 새로운 시도를 곳곳에서 볼 수 있는 ‘구본신참’의 앨범이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 앨범 역시 장대한 2CD 구성의 고질병적인 단점만큼은 완전히 해결하지는 못한 것이 개인적으로 느낀 유일한 아쉬움이었다. 6번 트랙 Stimmen im Wald까지는 절묘한 완급조절을 통해 완벽에 가까운 구성을 선보이며 일말의 지루함조차 느낄 수 없었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단조로움이 느껴지기도 했고, 곡의 길이는 더 길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1CD에 비해 2CD가 주는 임팩트가 적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앨범은 올해 가장 인상적인 블랙 메탈 앨범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몇 달 전 리뷰했던 Mare Cognitum과 Spectral Lore의 Wanderers: Astrology of the Nine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 역시 2시간에 달하는 완성도 높은 대작이었다고 생각한다. Wanderers: Astrology of the Nine이 예측할 수 없는 변화구와도 같은 다채로운 전개로 승부를 봤다면 이 작품은 2시간 내내 일관성 있게 몰아붙이는 돌직구 같은 작품이었던 셈이다. 두 작품은 (넓은 의미에서)블랙 메탈이라는 점과 규격 외의 거대한 길이를 자랑한다는 점 외에도 흥미로운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작품이 깨달음을 찾아 떠나는 여행자의 장대한 여정과도 같다는 점이 것이 그것이다. Wanderers: Astrology of the Nine이 태양계 행성들을 거치는 점성술적인 여정을 그려냈다면 Im Wald는 눈보라가 몰아치는 깊은 숲속에서의 기나긴 여정을 그려낸다. 즉, 두 앨범 모두 정신적인 여정을 테마로 함으로써 청자로 하여금 예술가의 정신과 내면을 체험할 수 있게 해 주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Wintherr는 Paysage d'Hiver의 음악은 자신의 가장 사적이고 진심 어린, 더 나아가 그의 내적 자아 그 자체와도 같은 것이라고 밝혔다. 때문에 각각의 (데모)앨범들은 하나의 거대한 여정의 일부이자 Wintherr의 내적 자아를 투영하고 있다. 또한 그가 겨울의 풍경을 주제로 삼은 이유는 그는 어렸을 적부터 눈 덮인 자연의 모습을 동경했고 그곳을 통찰과 깨달음을 주는 명상의 장소로서 생각해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어릴 적부터 워크맨으로 블랙 메탈을 들으며 겨울의 산과 숲을 거니며 그러한 풍경과 블랙 메탈에 깊은 연관성을 느꼈다고도 한다.
대부분의 음악 작업을 홀로 진행하고 인터뷰조차 자주 하지 않으며 은둔자와도 같은 삶을 살아온 그지만, 철저하게 사적인 그의 음악을 발매한 것에 대해서는 후회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때때로 그는 팬들에게서 그의 음악에 대한 의견을 들으며 고마움을 느끼기도 했는데, 그 중에서도 이탈리아의 한 어린 여성이 2007년도에 발매된 Einsamkeit가 자신을 자살하려는 것으로부터 구해주었다는 말에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음악을 발매한 것에 대한 자긍심을 느끼게 해 주었다고 한다.
이처럼 Wintherr는 흔히 블랙 메탈 하면 떠오르는 철저히 어둡고 부정적인 모습과는 사뭇 다른 면모를 인터뷰를 통해 보여주었다. 오히려 그는 자기 자신은 전혀 부정적인 인물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그가 생각하는 블랙 메탈의 목적은 어둠이나 어두운 것에 대해 직접적으로 다룸으로써 그것을 이해하고 직면하여 결과적으로 어둠을 극복하는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어둠이란 단순히 ‘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자연적인 것이자 우리에게 내재된 것이며 불편함을 느끼게 하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불편함을 주는 것들로부터 피하고 무시하려 하지만, 그것이 해답이 될 수는 없다. 오히려 그것을 회피할수록 어둠은 더 크고 가깝게 다가온다. 하지만 예술은 불편한 주제를 다룸으로써 우리의 내면을 비추고 그것을 이해하게 만든다. 특히 블랙 메탈은 이러한 ‘어둠’을 직접 다루면서 그것을 이해하고 깨달음을 얻게 하여 빛을 불러오는 기능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어둠이 무한한 것이 아니라면, 블랙 메탈이 다루는 어두운 주제는 언젠가 소멸할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한 면에서 그는 블랙 메탈은 우리 사회의 ‘보건 계획’이라고도 말하기도 했다.
이러한 Wintherr의 의견에 대해 동의하는지에 대한 여부와 관계없이 그의 색다른 통찰력은 블랙 메탈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 전혀 다른 관점을 제시해 준다고 생각한다. 블랙 메탈은 때때로 메탈의 하위 장르 내에서도 가장 반사회적, 반체제적 특성을 보여주며 가끔은 단순히 음악을 위한 컨셉 잡기가 아닌 실제 극단주의자의 이념을 표출하기 위한 도구로도 사용된다. 때문에 블랙 메탈은 더없이 위험한 장르로서 낙인찍히기도 했지만, 어떻게 보면 그러한 블랙 메탈의 목소리는 우리 사회가 지닌 어두운 면모를 직면하게 해 주는 유용한 기능을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또한 이러한 문제에 대해 단순히 회피하고 억누르는 것은 절대 해답이 될 수 없으며, 그것을 직면하는 것으로부터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이 가능하다는 것은 충분히 깊이 생각해 볼 만한 논점이라고 말하고 싶다.
어쨌거나 Paysage d'Hiver의 23년 만의 정규 앨범 Im Wald는 여느 때처럼 Wintherr의 가장 사적인 작품이지만 올해 발매된 블랙 메탈 앨범들 중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품 중 하나가 될 것이다. Wintherr는 고작 여섯 사람만이 자신의 음악을 알아준다고 하더라도 음악을 발매한 것에 대한 가치를 느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기만족을 위해 음악을 발표하는 것이 아니라 팬들의 가치 있는 경험을 위해 음악을 발표했다고 한다. 그러한 면에서 Im Wald는 이미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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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ck Medicine –
Irreversible (2015) |
(95/100) Jun 30, 2020 |

돈을 벌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음악을 하는 이유
2005년 인천에서 결성된 둠/스토너/슬럿지 메탈 밴드 블랙 메디신은 한국 최초의 데스 메탈 밴드 스컨드렐과 사두의 기타리스트였던 이명희와 데스 메탈 밴드 시드의 보컬이었던 김창유가 주축이 되었던 밴드이다. 비록 결성은 2005년도에 했었지만 이들의 첫 정규 앨범 Irreversible은 무려 10년 뒤인 2015년이 돼서야 발매될 수 있었다.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린 이유는 물론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현실적인 요인 또한 매우 컸을 것이다. 그들은 여러 회사와 접촉도 해 보고 EP 발매를 위해 녹음도 했었다고 하나 결과적으로 일이 안 풀리게 되어 10년이라는 세월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특히 보컬 김창유의 경우 음악을 하기 위해 그동안 막노동을 해가며 살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우여곡절 끝에 발매된 이들의 1집 Irreversible은 비록 작은 규모지만 순도 높은 호평을 받으며 ‘기적과 같은 앨범’이라는 찬사 또한 받기도 했다. 발매 이후 한동한 활발하게 활동했던 이들은 2016년 이명희를 제외한 다른 멤버들이 밴드를 탈퇴한 이후로 별다른 활동이 없기는 하지만 블랙메디신은 아직까지 살아 있는 상태라고 한다.
이들의 밴드 로고가 블랙 사바스 1집 시절 로고 폰트를 빼다 박은 수준이라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이들의 음악적 뿌리는 Black Sabbath에서 비롯되었다. 이 앨범의 스타일 또한 Black Sabbath, 그것도 그들의 1집을 바탕으로 하여 만들어졌다고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앨범의 사운드가 50년 전 Black Sabbath와 똑같은 건 아니고 이 앨범 속에는 현대적인 면모 또한 공존한다. 비유하자면 80년대 스래쉬 메탈 사운드와 00년대 이후 소위 리바이벌 스래쉬라고 불리우는 스래쉬 메탈의 차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옛날 그때 그 시절 느낌을 살리면서도 빵빵하고 모던한 레코딩 역시 두드러지는 점이 주요한 포인트라고 할 수 있겠다.
첫 번째 곡 The Arson Boy를 들어 보면 이러한 이 앨범의 특징을 단번에 느낄 수 있을 것이다. Black Sabbath의 명곡 Paranoid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인트로와 함께 시작하는 이 곡은 곧이어 끈덕진 메인 리프와 걸쭉한 보컬로 강렬한 첫인상을 남겨 준다. 이후 취하는 듯한 몽롱한 솔로와 빠른 템포의 후반부 모두 초기 Black Sabbath의 면모를 느낄 수 있으면서도 이들만의 색깔을 보여주었다.
마찬가지로 맛깔나는 리프가 인상적인 도입부부터 귀를 사로잡는 Sludge Song 또한 Black Sabbath와 스토너 록/메탈의 무겁고 진득한 느낌으로 가득한 곡이다. 거칠고 매력적인 보컬과 9분이 넘어가면서도 지루하지 않게 곡을 이끌어나가는 구성 또한 인상적이었다.
한편 세 번째 곡 Medicide는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는 듯한 곡으로, 무겁게 한 발 한 발 발걸음을 내딛는 듯한 진중함이 두드러진다. 후반부에서는 템포가 빨라지며 다시금 흥겨운 리프와 전개로 깔끔한 마무리를 선보였다.
이어지는 Your Devilish Smile은 시종일관 강하게 몰아붙이는 느낌을 주는 곡으로, 앞선 곡들처럼 메인 리프부터가 마음에 들었던 곡이다. 곡 후반부에서는 고조된 분위기 속에서 펼쳐지는 솔로 배틀이 인상적이었다.
다섯 번째 트랙 Road Swamp는 마약에 대한 영어 샘플링을 담아 서구적인 느낌을 부각하지만 정작 가사는 유일하게 한국어로 된 곡이다. 때문에 이 곡에서는 한국어 보컬과 스토너 메탈 사운드의 조화를 맛볼 수 있는 곡이기도 하다. 물론 곡의 완성도는 역시나 앞선 곡들 못지않다.
대개 일반적인 앨범의 중후반부에 위치한 트랙은 존재감이 없는 편인 곡인 경우가 많지만 이 앨범의 6번 곡 Night Flames는 초반부 트랙들과 비교해 봐도 부족함이 없는 멋진 곡이었다. 역시나 리프 하나하나가 버릴 것 없이 기억에 남았고, 흥 넘치는 전개로 짧지 않은 시간인 7분을 이끌어 간다.
마찬가지로 일곱 번째 곡 Misdirected Rage도 앨범 후반부에 수록된 가장 짧은 곡이지만 무시 못 할 존재감을 표출하는 곡이다. 우선 빠른 템포로 청자를 다시 한번 뒤흔들어 놓은 뒤 후반부에서 무겁고 사이키델릭한 전환을 선보이기도 했다.
마지막 곡 Riots Rage는 조용하고 잔잔하게 시작하다가 중반부부터 마치 폭발하듯 터져 나오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비장미마저 느껴지는 이 부분은 짧지만 앨범을 대미를 장식하기에도 부족함이 없었던 강렬한 클라이맥스였고, 이후로는 Black Sabbath 1집의 마지막 곡 Warning처럼 긴 솔로와 가라앉은 분위기로 앨범을 마무리했다.
전반적으로 Black Sabbath를 근본으로 하여 80년대 둠 메탈과 스토너 메탈, 슬럿지 메탈 전반을 아우르는 느낌이 고루 들어가 있었던 작품이었다. 수록된 여덟 곡 모두 어느 하나 버릴 곡 없이 우수했고, 전반적인 구성 역시 한 시간 동안 지루하지 않게 이끌어 나갔다. 또한 머리가 절로 흔들어지는 훌륭한 리프들이 가득하며 거칠고 투박한 듯하면서도 현대적인 깔끔함이 공존하는 앨범이기도 하다. 드럼 사운드의 고전적인 느낌은 Black Sabbath의 그것과 똑 닮았으며, 퍼지한 기타 톤 역시 나른하고 무거운 장르적 특색을 잘 살리는데 일조했다. 보컬 김창유의 거칠고 걸쭉한 생목 보컬 역시 진득한 연주의 느낌과 완벽한 합치를 이루었다.
그리하여 이 앨범은 Black Sabbath의 사운드를 계승하면서도 독자적인 음악적 세계를 구축한 Pentagram이나 Sleep과 Electric Wizard같은 둠 메탈 및 스토너 메탈 거장들의 음악과 비교해 봐도 부족함이 없는 수준의 뛰어난 완성도를 보여주었다. 솔직히 말해 한국에서 이 정도 수준의 앨범이, 그것도 데뷔 앨범이 나오리라고 누가 예상했었을까? 물론 이들은 이 앨범을 발표하기까지 무려 1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지만 결국 이들은 이 작품을 통해 한국 록/메탈 계보에 작지만 뚜렷한 족적을 남길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 남는 것은 결과물이기에 아무리 오랜 시간 노력하고, 또 재능이 있더라도 뚜렷한 결과를 남기지 못하면 기억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기타리스트 이명희에 따르면 앨범이 나오기 전까지는 주변에서 손가락질도 당하고 했는데 마침내 앨범이 나오고 호평을 받아서 속이 시원했다고 한다. 이처럼 현실적으로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그것을 증명할 만한 결과를 보여주지 못한다면 ‘시간 낭비만 한다’라는 비난을 받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블랙 메디신은 이 앨범을 통해 그들의 저력을 당당하게 증명할 수 있었다.
물론 이 작품이 침체된 한국 메탈 장르를 획기적으로 부흥시켰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2016년 이명희를 제외한 다른 멤버들이 밴드를 탈퇴하게 되면서 블랙 메디신은 짧은 활동 이후 사실상 멈춰 버린 다른 수많은 한국의 메탈 밴드들처럼 멈춰 있다. 하지만 이들이 대대적인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고 해서 이들이 실패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이들은 앨범을 고생 끝에 발표했다고 해서 대중적인 인기를 얻을 것이라고는 애초에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들은 돈을 벌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굳이 10년씩이나 걸려가며 데뷔작을 발표했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 보컬 김창유는 2015년 허핑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답했다.
“성전환하는 가장 큰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그게 자신의 정신이 갖는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음악은 돈을 버는 수단이 아니라 내 정체성의 일부다. 누구에겐 너무 진지하게 들리겠지만 사실이다.”
이러한 그의 답변은 블랙 메디신뿐 아니라 메탈 음악을 포함한 모든 비주류 예술, 즉 돈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예술을 계속해나가는 적지 않은 사람들의 신념을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돈을 버는 게 아니라 큰 돈을 써가면서까지 예술을 하는 이유는 당연히 ‘본인이 하고 싶으니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상업적 성공은 애초에 의도한 주요 목적이 아닐 것이다. 때문에 블랙 메디신의 데뷔작 Irreversible은 그들 스스로 만족감을 느꼈고, 아무리 적은 수라고 할지라도 열광적이고 진심 어린 호평을 받았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히 대성공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느덧 이 앨범이 세상에 나온 지도 5년 가까이 되었다. 활동을 중단해버린 많은 국내 밴드들처럼 이들의 차기작에 대한 기대감은 막연하게만 느껴질 지도 모른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또다시 10년이라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아니면 더 긴 시간이 걸리더라도 음악에 대한 의지와 열정이 있다면 언제든지 새로운 음악을 보여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이들의 음악을 즐긴 한 사람으로서 언젠가는 블랙 메디신의 음악이 다시 한번 빛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97/100
*블랙 메디신의 1집 Irreversible은 CD와 LP 모두 향뮤직, Yes24 등의 웹사이트를 통해 지금도 구매할 수 있습니다.
*[허핑턴 인터뷰] 블랙 메디신, '우리 무서운 사람들 아니에요'
https://www.huffingtonpost.kr/sehoi-park/story_b_8102036.html ... 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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