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림씨어터, 꿈의 기하학] 1장: 롱아일랜드의 몽상가들 (1974 - 1985)


프롤로그 바로가기
제1부: 거인의 요람
1장: 롱아일랜드의 몽상가들 (1974 - 1985)
1. 거실의 두 소리
1970년대 후반, 맨해튼의 마천루 불빛이 닿지 않는 롱아일랜드 북안의 킹스 파크. 밤마다 해무가 깔리는 이 소도시를 지배하는 건 수천 명의 환자를 수용한 붉은 벽돌의 국립 정신병원이었다. 쫓기듯 바다를 건너온 이탈리아와 아일랜드계 이민자들이 3교대 근무를 마치고 지친 몸을 뉘일 무렵, 동네 차고와 지하실에선 어김없이 앰프 진공관이 달아올랐다. 소년들은 낡은 셔터문 틈새로 거친 디스토션과 어지러운 드럼 비트를 쏟아내며 마을의 침묵을 찢었다.
킹스 파크의 2층 주택에 터를 잡은 페트루치 일가는, 주말이면 식탁에 파스타와 고기 요리가 쌓이는 이탈리아계 가정이었다. 그러나 음악적으로 대단한 유산을 물려받은 집안은 아니었다. 남동생이 베이스 기타를 만지작거리고 아버지가 노래 부르기를 즐기긴 했으나, 집안의 악기라고는 거실 한구석의 오르간이 전부였다.
이 집안을 지배하는 공기는 음계와 화성이 아니라 기호와 논리였다. 어머니가 집안의 정서적 온기를 책임졌다면, 초창기 컴퓨터 프로그래머이자 비즈니스맨이었던 아버지는 어린 존 페트루치에게 수학과 공학의 세계를 열어준 사람이었다.
어느 저녁, 아버지가 회사에서 거대한 물건을 들고 돌아왔다. 타자기 두 대를 합쳐 놓은 크기의 금속 기계였다. 거실 바닥에 내려놓고 전화선의 한쪽 끝을 기계의 부속에 꽂았다. 어린 페트루치는 카펫 위에 쭈그려앉아 그 광경을 응시했다.
"이게 뭐예요, 아빠?"
"모뎀이라는 거란다. 자, 이리 와서 보렴."
아버지는 아들을 무릎 위에 앉혔다. 전원을 넣자 낮은 진동음이 바닥을 타고 흘렀고, 잠시 후 모니터 위에 초록색 커서가 깜빡이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손가락이 키보드를 두드리자 화면 위로 글자들이 한 줄씩 떠올랐다.
"저 글자들은 어디에서 오는 거예요?"
"멀리 떨어진 다른 컴퓨터에서. 전화선을 타고 여기까지 오는 거란다."
페트루치는 숨을 죽인 채 모니터를 응시했다. 세상이 보이지 않는 기하학적 규칙과 코드로 짜여져 있다는 사실이 소년의 머릿속에 새겨졌다. 거실 한쪽 벽 너머에서는 큰누나가 오르간으로 옛 이탈리아 민요를 연주하고 있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아버지가 모뎀의 다이얼을 돌리고 있었다. 멜로디와 신호음이 같은 거실의 공기 안에서 동시에 울렸다. 훗날 그가 기타 지판 위에서 보여줄 결합의 씨앗은, 그 두 소리 사이에서 발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떠들썩한 가족 합주 속에서 여덟 살의 페트루치는 종종 고립감을 느꼈다. 어둠이 깔린 방, 얇은 벽 너머로 쉴 새 없이 밀려드는 큰누나의 오르간 소리에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났다. 커다란 악기로 집안의 공기를 진동시키고 부모의 시선을 장악하는 누나의 모습이 소년의 승부욕을 끓어오르게 했다. 기계의 코드를 통제하는 아버지처럼, 저 음표의 배열을 통제할 수만 있다면 이 공간을 지배할 수 있다고 소년은 믿었다.
다음 날 방과 후, 페트루치는 먼지 뽀얀 싸구려 어쿠스틱 기타를 집어 들었다. 누나가 누르던 건반의 기세를 이 나무통으로 꺾어버릴 참이었다. 하지만 기타는 아버지의 모뎀처럼 알아서 작동해 주지 않았다. 넥은 여덟 살 소년이 품기엔 너무 두꺼웠고, 뻣뻣한 쇠줄은 손가락 끝을 파고들었다. 낡은 교본을 무릎에 올리고 지판을 짚었지만 둔탁한 소음만 튕겨 나왔다. 게다가 부모가 연습 시간을 토요일 낮으로 제한해버리는 바람에, 늦게까지 깨어있겠다던 계획마저 무너졌다.
몇 주간의 사투 끝에, 붓고 물집 잡힌 손가락을 부여잡은 페트루치는 기어이 기타를 방구석으로 내동댕이쳤다. 쇳줄은 소년이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는 혼돈 그 자체였다.
"다시는 안 쳐!"
씩씩거리며 방문을 쾅 닫고 나간 등 뒤로, 주인 잃은 낡은 통기타만 덩그러니 나뒹굴었다.
2. 역설계
방구석에 내팽개쳐진 통기타 위로 먼지가 쌓이는 동안, 1980년대 초반 영국에서 융성한 헤비메탈의 파도가 대서양을 건너 롱아일랜드 해안을 덮쳤다.
여덟 살의 페트루치에게 어쿠스틱 기타는 통제되지 않는 마른 장작더미에 불과했다. 하지만 몇 해가 흐른 후, 킹스 파크 소년들의 차고에서 터져 나오는 일렉트릭 기타의 소리는 달랐다. 담장 너머로 밀려드는 아이언 메이든의 트윈 기타 리프, 러쉬가 쌓아 올린 화음의 기하학은 페트루치의 귀에 계시처럼 꽂혔다.
열두 살 무렵, 일렉트릭 기타를 거머쥔 페트루치는 그 강철 파도에 올라탔다. 사춘기에 접어든 소년에게 기타는 천재성의 발현이나 록스타의 낭만이 아니라, 무리에서 밀려나지 않으려는 생존 도구에 가까웠다. 무거운 기타 케이스를 등에 멨을 때야 비로소 소속감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페트루치의 우상들은 거의 모두가 알(Al)이거나 스티브(Steve)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스티브 바이, 알 디 메올라, 스티브 하우, 스티브 모스, 알렉스 라이프슨, 그리고 재즈 록의 혁신가 앨런 홀스워스. 그 외에도 로저 워터스와 피터 가브리엘 같은 서사의 거장들과, 주다스 프리스트와 아이언 메이든이 침실 벽을 채웠다. 그는 우상들의 솔로를 듣고 또 들었지만, 듣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해부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고등학생이 되자 여름방학이 시작되기 무섭게 방문을 닫아걸었다.
"존, 저녁 먹어라. 아침부터 몇 시간째 틀어박힌 거니."
"나중에요. 흐름 끊고 싶지 않아요."
창밖으로 또래들이 야구 방망이를 휘두르며 뛰어노는 소리가 들려와도 페트루치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방 안에는 헤비메탈의 소음 대신 기괴하고 느릿한 기계음이 깔려 있었다. 그는 우상들의 레코드를 절반 속도로 턴테이블에 돌리고 있었다.
빠르게 쇄도하던 기타 솔로가 무겁게 늘어졌다. 1초도 안 되어 흘러가버렸을 16분음표의 폭풍이, 두 배로 늘어난 시간 안에서 한 음 한 음 분리되어 들렸다. 페트루치는 기타를 무릎에 올린 채 느려진 음들을 하나하나 주워 담았다. 어떤 음은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미세했고, 어떤 음은 연주자가 의도적으로 흘려보낸 장식음이었다. 그것들이 모두 제자리에 돌아갈 때까지 같은 구간을 수십 번, 수백 번 반복해서 들었다.
시간을 강제로 늘려 거장들의 연주를 해부하고, 구조를 역설계하는 작업이었다. 모뎀 앞에서 코드의 줄기를 따라가던 아버지의 시선이, 아들의 방에서는 기타 지판을 향한 분석적 광기로 되살아나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신호를 정확한 순서대로 다시 조립해 내는 일. 그것이 페트루치가 음악과 맺은 첫 번째 계약이었다.
하루 12시간. 오직 메트로놈의 차가운 규율 아래서 속도와 정밀성을 극한으로 밀어붙였다. 손가락 끝에 물집이 잡히고 터져 단단한 굳은살로 덮일 때까지 피킹은 멈추지 않았다. 통제 불능의 세상을 여섯 개의 쇠줄로 묶어 구조물로 재조립하려는, 사력을 다한 싸움이었다.
방구석의 고립은 이내 동네 차고로 뻗어나갔다. 조립해낸 연주를 밴드의 합에 맞춰 시연해 볼 무대가 필요했다. 페트루치는 또래들을 모아 첫 스쿨밴드 '센튜리온(Centurion)'을 결성했다. 이 밴드에는 동네 친구 케빈 무어도 합류했다.
바로 옆집이나 다름없는 거리에 살던 두 집은 부모들끼리도 친구였고, 동네 야유회와 피크닉마다 두 소년은 늘 함께 어울렸다. 무어는 다섯 살 때부터 피아노 레슨을 받았다. 그 시간이 손가락에 건반의 문법을 새겨주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이미 두 개의 밴드를 거친 무어가 센튜리온에 합류하면서, 셋리스트에는 도어스(The Doors)의 어둡고 몽환적인 곡들이 자리를 잡았다.
어린 시절부터 가장 친한 친구였던 두 사람은 이제 같은 무대에서 같은 음악을 만드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페트루치에게 케빈은 단순한 밴드 동료가 아니었다. 킹스 파크라는 유년 시절 그 자체였고, 음악이라는 미지의 언어를 가장 먼저 함께 독해해 나간 사람이었다.
3. 네 줄짜리 악기
페트루치의 집에서 몇 블록 떨어진 킹스 파크의 또 다른 2층 주택. 거실의 턴테이블 위에서는 늘 LP판이 돌아가고 있었다.
한국 전쟁을 피해 바다를 건너온 동갑내기 소년 존 명(John Ro Myung)의 부모는 시카고에서 아들을 낳은 뒤 뉴욕으로 이주했다. 처음에는 뉴욕시에 정착했고, 명이 일곱 살이 되던 해에 킹스 파크로 옮겨왔다. 주류 사회에 안착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아버지는 기업의 재무 담당자로 일했고, 어머니는 병원에서 교대 근무를 하는 간호사였다.
어머니가 트는 음악은 거의 언제나 클래식이었다. 베토벤의 교향곡,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과 푸가, 차이콥스키의 발레 음악과 협주곡. 다섯 살의 명은 거실 카펫 위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그 음악들을 들으며 자랐다.
어머니는 명이 다섯 살이 되던 해에 바이올린을 쥐여주었다. 일본에서 건너온 '스즈키 훈련법'은 어린아이에게 악보보다 먼저 귀로 음을 익히게 하고, 끊임없는 반복을 통해 손가락에 멜로디를 새겨 넣는 방식이었다. 어머니는 매일 같은 시간에 명을 거실 한가운데에 세우고, 같은 곡을 같은 자세로 반복해서 켜게 했다. 명은 묵묵히 지시를 따랐다. 왜 자기가 매일 그 시간에 그 자리에 서서 같은 곡을 켜야 하는지는 묻지 않았다.
그 순종 안에서, 명의 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깊은 음악적 감수성을 새겨 넣고 있었다. 다섯 살부터 열다섯 살까지 10년간 매일 반복된 행위가, 클래식의 건축적 정밀성을 한 켜 한 켜 쌓아 올렸다. 명은 알지 못했지만, 몸은 알고 있었다.
집 안에서는 모국어 사용이 금지되었다. 부모는 아들이 미국 사회에 완벽하게 동화되기를 바랐다. 한국어로 말하는 일은 거의 없었고, 식탁의 대화는 영어로 이루어졌다. 명은 부모가 둘끼리 한국어로 짧게 이야기를 나누는 순간을 가끔 들었지만, 그 언어는 자신에게 허락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 사실에 대해서도 묻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바이올린 활은 그의 몸과 점점 어긋나기 시작했다. 사춘기에 접어든 명의 손가락은 더 이상 다섯 살 때처럼 어머니가 지시하는 자세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또래 친구들이 동네 차고에서 토해내는 시끄러운 소리가 침실 창문으로 흘러 들어왔다. 방과 후 친구네 집에 가면 거실에는 사바스가, 러쉬가, 예스가, 제네시스가, 아이언 메이든이 흐르고 있었다. 명은 그 음악들 앞에 처음으로 멈춰 섰다.
어머니의 거실에서 듣던 클래식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소리였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선 같은 종류였다. 정교하게 쌓아 올린 구조, 반복되는 모티프, 점진적으로 고조되는 긴장. 사바스의 리프가 한 마디씩 무겁게 발걸음을 내딛는 방식은, 명의 귀에 어딘가 바흐의 푸가를 닮아 있었다.
열다섯 살이 되던 해, 또래들이 그를 찾아왔다. 차고에서 밴드를 하려던 아이들이었다. 기타와 드럼은 구했지만 베이스가 없었다. 그들 중 한 명이 명의 거실에 세워진 바이올린 케이스를 떠올렸다.
"존, 너 바이올린 켜잖아. 그거 줄이 네 개지? 베이스도 똑같이 네 개야. 그러니까 네가 치면 딱 맞겠네."
음악적 근본이 다른 두 악기를 줄의 개수로 묶어버린 궤변이었다. 그러나 명은 받아들였다. 줄이 네 개라는 사실. 그에겐 충분히 논리적이었다.
"말이 되네. 내가 할게."
그날 명은 10년간 턱을 짓누르던 바이올린을 케이스에 넣고 닫았다. 어머니에게 곧바로 알리지는 않았다. 다음 날 친구가 빌려다 준 일렉트릭 베이스를 방으로 들고 들어왔다.
크고 무거운 악기였다. 바이올린이 어깨 위에 가볍게 올라가는 악기였다면, 베이스는 목에 끈을 걸고 양손으로 잡아야 하는 묵직한 물체였다. 처음으로 가슴 앞에 걸었다. 작은 앰프에 케이블을 연결하고, 가장 굵은 줄을 엄지로 한 번 퉁겼다.
낮은 진동이 바닥을 타고 올라와 발끝을 때렸다. 진동은 발끝에서 멈추지 않고 몸 전체를 천천히 통과했다. 바이올린의 날카로운 고음과는 다른 감각이었다. 허공으로 흩어지는 소리가 아니라 뼛속으로 스며드는 소리. 표면 위로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가장 아래에서 모든 것을 떠받치는 소리.
처음 느끼는 안도감이 몸 안으로 퍼졌다.
곧장 턴테이블에 아이언 메이든의 LP를 올리고 재생 속도를 45rpm으로 높였다. 스티브 해리스의 베이스 라인이 인간의 한계를 넘어 질주했다. 그 속도를 따라잡으려 손가락을 맹렬히 움직였다. 굵은 쇠줄을 뜯느라 지문이 갈라지고 픽가드 위로 피가 떨어졌지만 연주는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이 소음은 낯선 땅에서 악착같이 버티며 외아들의 주류 사회 편입만을 바라온 아버지에게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어느 날, 끝없이 이어지는 진동을 견디다 못한 아버지가 명의 방문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바이올린 활을 쥐고 있어야 할 아들은 낯선 쇳덩어리를 목에 건 채 손가락에서 피를 흘리며 서 있었다. 발밑의 앰프에서 굉음이 울렸다. 아버지의 얼굴이 붉게 굳었다.
"공부해서 번듯한 직장에 갈 생각은 않고, 고작 딴따라가 되려는 게냐!"
한국어가 아닌 그 영어 문장 안에는 한국 전쟁을 피해 바다를 건너온 이민자 아버지가 외아들에게 걸어온 기대의 무게가 담겨 있었다. 명문대, 안정적인 직장,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자리. 자기 아들이 미국 사회에서 미끄러지지 않을 발판 위에 서기를 원했다. 그 발판에 베이스라는 악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앰프를 걷어차 박살 내고, 연결된 케이블을 모조리 뜯어냈다. 요란하던 소리가 멈추고, 방 안에는 정적과 부서진 앰프의 잔해가 내려앉았다.
소년은 대들지 않았다. 그날 밤 박살 난 앰프 앞에서, 명은 플러그가 뽑힌 베이스를 고쳐 안고 다시 쇠줄을 뜯었다. 앰프가 없어도, 피가 묻은 손가락이 만들어내는 진동은 뼈를 울리고 있었다.
부모의 통제를 벗어나려는 치기가 아니었다. 타인의 규율을 덜어낸 빈자리에, 그보다 엄격한 자기 계율을 채워 넣는 의식이었다. 얄팍한 논리에 이끌려 악기를 잡았던 소년은, 전면에 나서기보다 세상의 소란을 밑바닥에서 빨아들이는 존재가 되어갔다. 차고의 어둠 속에서, 소년은 자신의 세계를 조용히 다시 조립해나가고 있었다.
킹스 파크의 저녁. 무질서를 전기의 창으로 통제하려 씨름하는 페트루치의 피킹. 바닥을 지탱하려 피 흘리며 현을 뜯는 명의 리듬. 서로의 존재를 모르는 두 소년의 닫힌 방문 너머로, 훗날 밴드를 지탱할 두 심장이 나란히 고동치고 있었다.
4. 피의 맹세
킹스 파크 고등학교의 소란스러운 복도. 등에 기타 케이스를 멘 페트루치와 묵직한 베이스를 든 명이 마주쳤다. 긴 머리로 얼굴을 가린 명의 손끝에 페트루치의 시선이 멈췄다. 굳은살이 터져 픽가드에 긁힌 피가 검게 엉겨 붙은 흔적이었다.
"오늘 6시간 할당량은 채웠어?" 페트루치가 건조하게 물었다.
명은 앞머리 사이로 힐끗 시선을 던졌다.
"메이든. 45rpm으로. 넌?"
"당연하지. 네가 6시간 채웠는데 내가 4시간만 치고 잤을까 봐?"
남다른 관계였다. 서로의 나태함을 감시하고, 한쪽이 조금이라도 느슨해지면 다른 한쪽에게 죄책감을 주입하는 '피의 맹세(The 6-Hour Pact)'로 스스로를 결박한 우정이었다.
이 결속은 교실에서도 파열음을 냈다. 킹스 파크 고등학교 음악 이론 시간. 교사가 바흐의 합창곡 화성을 작곡해 오라는 과제를 칠판에 적었을 때, 두 소년은 보란 듯이 펜의 궤적을 비틀었다.
다음 날 교탁 위에 올려진 과제물은 정갈한 4성부 합창보가 아니었다. 전통 화성학의 뼈대를 꼬아 일렉트릭 기타와 베이스를 위한 헤비메탈 연주곡으로 개조한 악보였다. 붉은 펜을 든 교사가 악보와 두 소년을 번갈아 보았지만, 두 공범은 변명 없이 서로 눈빛만을 교환했다.
방과 후면 두 사람은 페트루치의 지하실이나 명의 차고에 모여 합주를 시작했다. 많은 말은 필요 없었다. 한쪽이 리프의 박자를 슬쩍 비틀면 다른 한쪽은 그 비틀림을 받아냈고, 한쪽이 멜로디를 비우면 다른 한쪽이 빈 공간을 정확히 메웠다. 서로 다른 악기를 들고 있었지만, 연주는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처럼 맞물렸다.
서로를 찌르며 성장하는 사운드가 날카로워질수록, 킹스 파크라는 도시는 그들의 에너지를 담아두기에 비좁게 느껴졌다. 어느 늦은 밤, 땀범벅으로 합주를 마친 페트루치가 거친 숨을 골랐다.
"존, 여기선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어. 보스턴으로 가자."
"버클리." 명이 나지막이 응답했다.
"그래. 전 세계의 미친 괴물들이 모이는 곳이잖아. 거기서 우리가 어느 정도인지 확인해 보는 거야."
명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5. 빈 교실의 증인
페트루치가 침실 벽에 사진을 붙여두고 흠모하던 기타 영웅들, 스티브 바이와 알 디 메올라가 거쳐 간 학교. 버클리는 이미 그에게 반드시 통과해야 할 관문이었다.
그러나 첫 번째 관문은 부모님이었다.
페트루치는 성적이 우수한 편이었다. 수학과 과학에서 뛰어났고, 글쓰기와 미술에도 재능을 보였다.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일생을 일군 아버지는 아들이 공학이나 비즈니스의 길을 걷기를 바랐다. 페트루치의 부모에게 음악은 취미로 남겨둘 일이지, 대학 4년과 막대한 학비를 쏟아부을 종류의 일은 아니었다. 아들의 설득은 부모의 귀를 넘어 마음까지 닿지 못하고 있었다.
교착 상태를 뚫은 건 제3의 인물이었다.
페트루치는 점심시간마다 학교 밴드 교사 필 스텐츠의 텅 빈 음악 교실에 들어가 기타를 연습했다. 스텐츠의 수업을 들은 적은 없었다. 그저 점심시간이 되면 식당 대신 빈 교실로 향했고, 스텐츠는 이를 묵인했을 뿐이었다.
늘 같은 자리에 앉은 페트루치는 가방에서 샌드위치를 꺼내 책상 한쪽으로 밀어두고, 메트로놈을 켜놓고 연주에 몰두했다. 음이 하나라도 흐트러지면 멈췄고, 멈추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50분 동안 연주하는 프레이즈는 단 하나일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 하나의 프레이즈가 50분 후에는 두 단계 더 빨라져 있었다.
스텐츠는 교무실로 가던 길에 자기 교실에서 새어 나오는 기타 소리를 듣고 문 앞에 멈춰 섰다. 유리창 너머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한 번도 가르친 적 없는 학생이 텅 빈 교실 구석에서 메트로놈을 옆에 두고 같은 프레이즈를 반복하고 있었다.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점심시간이면 문 앞을 지나가며 안을 들여다보았다. 페트루치는 늘 그 자리에 있었다.
그렇게 몇 달이 흘렀다.
학부모 면담일 오후, 페트루치의 부모가 학교를 방문했다. 담임 교사와 진로를 의논하던 중이었다. 컴퓨터공학이 좋겠다, 비즈니스가 안정적이다, 음악은 취미로 남겨두는 것이 옳다. 늘 듣던 이야기가 반복되고 있었다. 그때 음악실 쪽에서 한 사람이 복도를 건너왔다. 평소 학부모 면담에 거의 나타나지 않던 밴드 교사 필 스텐츠였다.
"잠시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을까요. 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페트루치 부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맞았다. 스텐츠는 짧게 자기를 소개한 뒤 본론으로 들어갔다.
"존은 제 수업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난 몇 달 동안 매일 점심시간마다 제 교실에 들어가 혼자 기타를 치는 걸 봤습니다."
어머니가 눈을 깜빡였다. 아버지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교사 생활을 하면서 그런 종류의 학생을 본 적은 거의 없습니다. 점심도 먹지 않고, 누구와 말도 섞지 않고, 같은 마디를 50분 동안 반복합니다. 매일같이요."
스텐츠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두 부부의 눈을 마주 보며 입을 열었다.
"존은 그곳에 가야 합니다."
"버클리 말씀이신가요?" 어머니가 물었다.
"예. 저는 그 아이가 그곳에 갈 수 있도록 두 분이 도와주시기를 부탁드리려고 왔습니다."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평생 컴퓨터와 숫자와 안정적인 미래를 신봉해온 사람이었다. 그러나 자기 아들을 가르친 적도 없는 교사가 학부모 면담일에 일부러 나타나, 가르친 적도 없는 학생의 미래를 보증하고 있다는 사실. 그것은 그가 평생 다뤄온 어떤 데이터와도 다른 종류의 증거였다.
그날 저녁, 페트루치는 방에서 기타를 연습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방문을 노크했다. 어머니의 손에 종이 한 장이 들려 있었다. 버클리 음악대학의 입학 원서였다.
"선생님 한 분이 네가 여기 꼭 가야 한다고 하시더구나."
페트루치는 원서를 받아들고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다. 누가 그런 말을 했는지 묻지 않았다. 점심시간마다 등 뒤로 살짝 열렸다가 다시 닫히던 교실 문의 인기척을 모르던 게 아니었다.
그날 밤 페트루치는 평소보다 한 시간 더 오래 메트로놈 앞에 앉아 있었다.
6. 소리의 도서관
킹스 파크 남쪽, 롱아일랜드의 해안 도시 롱비치. 대서양의 짠 바람이 늘 거리를 휩쓸고 지나가는 이 해안 마을의 한 주택에서, 훗날 거대한 드럼 요새 뒤에 앉게 될 소년이 자라고 있었다.
세속적 유대계 가정에서 자란 마이크 포트노이에게 집은 거대한 소리의 도서관이었다. 지역 록 라디오 DJ였던 아버지 하워드의 영향 아래, 소년의 침실은 벽면 전체가 천장까지 치솟은 LP의 숲으로 뒤덮였다. 비틀스의 화음과 도어스의 탐미주의, 레드 제플린과 러쉬의 박동이 새겨진 수천 장의 검은 원반들은 소년이 세상을 이해하는 사전이었다.
부모의 이른 이혼은 소년의 지붕을 두 갈래로 쪼개 놓았다. 주말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집을 오가는 진자 운동 속에서, 어린 포트노이가 닻을 내릴 수 있는 곳은 소리의 세계뿐이었다. 아버지가 진행하는 방송국 스튜디오는 소년의 은신처였다. 붉은색 'ON AIR' 사인이 켜진 부스 구석에 웅크린 채, 꼬마는 거대한 릴 테이프가 돌아가며 전파를 쏘아 보내는 광경을 넋을 잃고 지켜보았다. 아버지가 턴테이블의 바늘을 얹어 내릴 때마다 지직거리는 마찰음과 함께 터져 나오는 록 밴드들의 음악이, 소년의 분열된 일상을 하나로 잡아주는 접착제였다.
포트노이의 첫 악기는 피아노였다.
아들의 호기심을 알아챈 부모는 일곱 살 무렵부터 동네 피아노 교사에게 보냈다. 학교에서는 또래 중에 피아노를 다룰 줄 아는 아이가 거의 없었고, 그 사실이 작은 우월감을 주었다.
2학년 장기자랑이 다가왔을 때 포트노이는 무대에 오르기로 결심했다. 두 곡을 준비했다. 하나는 영화 《스팅》의 OST로 유명한 〈디 엔터테이너〉. 지난 몇 달 동안 가장 열심히 연습한 곡이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두 번째 곡이었다. 〈오 예(Oh Yeah)〉라는 제목의 곡은 자작곡이었다.
작곡이라고 부르기에는 민망할 만큼 단순했다. E코드와 C코드, 단 두 개의 화음만을 오갔다. 멜로디라고 할 만한 것도 거의 없었다. 그러나 어디에도 없던, 오직 일곱 살 포트노이로부터 창조된 곡이었다. 다른 누군가가 만든 곡을 따라 치는 것과, 자기 손가락 끝에서 빚어낸 음들을 치는 것 사이에 비교할 수 없는 차이가 있음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장기자랑 당일, 포트노이는 강당의 작은 무대 위 피아노 앞에 앉았다. 왼손으로 E코드를 짚고, 오른손으로 단순한 멜로디를 더한 뒤,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오 예…"
두 단어짜리 가사였다. E코드와 C코드를 오가며 같은 가사를 반복했다. 객석의 학부모들 중 몇몇은 어리둥절해했고, 몇몇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일곱 살의 마이크에게는 어떤 반응도 중요하지 않았다. 자기가 만든 곡을 자기 손가락으로 연주하고 있었다. 그게 전부였다.
그날 이후 마이크는 학교 행사가 있을 때마다 같은 두 곡을 들고 무대에 올랐다. 〈디 엔터테이너〉와 〈오 예〉. 친구들 사이에서 그는 작은 명성을 얻었다. 무대에 올라가 피아노를 칠 수 있는 아이. 자기가 만든 곡을 가진 아이.
그러나 피아니스트 포트노이의 시간은 오래 가지 않았다.
포트노이는 본디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는 아이였다. 수업 시간에도 책상 모서리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박자를 맞추곤 했고, 식탁에서도 포크와 나이프로 무언가를 끊임없이 두드렸다. 건반 앞에 정자세로 앉아 손가락만 움직여야 한다는 요구는, 그의 내면에서 들끓는 에너지를 가두고 있었다. 더 격렬한 것을 원했다. 더 큰 소리를, 더 강한 타격을, 몸 전체를 사용하는 무엇을.
계기는 우연히 찾아왔다. 1976년경, 플로리다의 사촌네 집을 방문했을 때 구석에 처박혀 있던 드럼 키트를 발견했다. 드럼 의자에 앉아 양손에 스틱을 쥐고, 처음으로 스네어 한가운데를 내리쳐 보았다.
탁.
손가락 끝에서 시작된 진동이 손목과 팔꿈치와 어깨를 거쳐 가슴까지 도달했다. 건반을 누를 때와는 다른 감각이었다. 두 번째 타격을 가했다. 세 번째. 네 번째. 차고 안에 소리가 쌓였다. 사촌이 차고 문을 열고 들여다보았을 때, 마이크는 그 자리에 한 시간째 앉아 있었다.
11살 생일을 기다리며 포트노이는 부모에게 거듭 말해두었다. 오직 드럼 한 세트만 있으면 된다고.
생일 날 거실에 모인 가족들 앞에서, 할아버지가 큰 상자 하나를 손자 앞에 내밀었다. 그토록 갖고 싶어했던 첫 드럼 키트였다. 작고 파란색으로 칠해진 로이스(Royce) 3기통. 베이스 드럼 하나, 스네어 하나, 탐탐 하나, 그리고 작은 심벌 하나. 단순한 키트였다. 그러나 바로 그게 포트노이가 원했던 전부였다.
"할아버지, 할머니, 고마워요!"
환호하며 할아버지에게 달려가 안겼다. 할아버지는 큰 손으로 마이크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웃었다. 손자가 지난 몇 달 동안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려왔는지를 알고 있었다. 포트노이는 그날 저녁 내내 새 드럼 키트 옆을 떠나지 못했다. 가벼운 패턴 몇 개를 시도해 보았고, 할아버지가 옆에 앉아 지켜보았다.
그게 할아버지의 마지막 미소였다.
그날 밤, 할아버지는 갑작스러운 가슴 통증에 무릎을 꿇었다. 심장마비였다. 황급히 병원으로 옮겨졌고, 의사들은 최선을 다했다. 일주일 뒤 할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마이크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 파란색 드럼 키트 앞에 앉았다. 한참 동안 아무것도 두드리지 않았다. 베이스 드럼의 페달 위에 발을 올리지도, 스틱을 손에 쥐지도 않은 채 그 작은 키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지난 일주일 동안 그는 그 드럼 위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박자를 만드는 환희를 알았다. 그리고 그 시작이, 일주일 전 거실에서 웃으며 머리를 헝클어뜨리던 사람의 마지막 선물이었다.
천천히 손을 뻗어 스네어의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차가운 금속 림이 손끝에 닿았다. 그제야 눈가가 걷잡을 수 없이 뜨거워졌다.
그날 이후 파란색 드럼은 단순한 생일 선물이 아닌 유산이 되었다. 11살의 포트노이에게는,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드럼을 사주는 일을 마지막 사명처럼 마무리하고 떠난 것처럼 느껴졌다.
그날 이후 드럼을 두드리는 일에는 강박의 굴레가 씌워졌다.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가는 시간, 마지막 인사도 없이 떠나가는 사람들. 스틱이 북 가죽에 닿는 그 순간만큼은, 그 한 박자의 길이만큼은, 세상이 손아귀 안에 있었다. 그래서 놓을 수 없었다.
헤드폰을 쓴 채 턴테이블에 '더 후'와 '키스'의 앨범을 올려놓고 스틱을 휘둘렀다. 처음에는 피터 크리스와 링고 스타와 키스 문과 존 본햄을 흉내냈다. 그러다가 1979년 '더 후'의 다큐멘터리 영화 《더 키즈 아 올라이트(The Kids Are Alright)》가 개봉했고, 화면 속 키스 문이 드럼 키트 뒤에 앉아 있는 모습이 그를 사로잡았다. 밴드의 한가운데서 무대 전체를 자기 박자로 움직이는 사람. 그날 이후 그의 영웅은 키스 문이 되었다.
상실의 구멍을 메우려는 강박은 소리의 배열과 수집으로 옮겨붙었다. 낡은 더블 데크 카세트 플레이어 앞에 앉아 녹음 버튼과 일시 정지 버튼을 조작하며, 곡과 곡 사이의 공백을 오차없이 재단해 자신만의 믹스테이프를 구워냈다. 앨범 뒷면의 라이너 노트와 세션맨들의 이름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외웠다. 음악 자체에 대한 열정이라기보다, 자기 손이 닿는 모든 사물을 정확한 자리에 배열함으로써 무너진 우주를 다시 세우려는 의식이었다.
그는 11살이었고,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자각하지 못했다. 매일 밤 헤드폰을 쓰고 드럼 의자에 앉으면 가슴 한가운데가 편해진다는 사실만을 알았다. 그게 슬픔과 협상하는 그만의 방식이었다.
7. 카르페 디엠
10대에 접어든 포트노이의 독학은 곧 실전으로 뻗어나갔다. 동네 친구들을 긁어모아 첫 아마추어 밴드 '인트루더(Intruder)'를 결성했다. 자신보다 두세 살 많은 멤버들 사이에서도 지휘자 역할을 자처했다. 누군가 박자를 놓치거나 코드를 잘못 짚으면 망설임 없이 심벌을 내리쳐 연주를 끊었다. 13살의 그가 17살의 멤버를 향해 "두 마디 전부터 다시"라고 지시했고, 형들은 묵묵히 따랐다.
학교 밖에서 그는 이미 작은 록스타였다. 그러나 학교 안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11학년 음악 교사 케네디의 눈에, 포트노이는 자기 재능을 알고 있는 학생이었고, 그 사실을 숨기려 하지 않는 학생이었다. 케네디는 수업 첫날부터 그를 주시했다. 칠판에 적은 박자 기호를 가리키며 포트노이를 호명하고, 일어서서 직접 손뼉으로 박자를 치라고 시켰다. 마이크가 정확하게 6박을 세어 보였지만 케네디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너는 그런 식으로는 이 수업에서 통과하지 못할 거다. 록 밴드에서 드럼 좀 친다고 음악을 안다고 생각하지 마라."
그날 이후 케네디의 표적은 늘 포트노이였다. 어려운 문제가 나오면 마이크를 호명해 답하게 했고, 정답을 맞히면 운이 좋았다고 했고, 틀리면 그것 보라고 했다. 학교 밴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케네디는 마이크의 연주가 정해진 규칙대로 굴러가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를 두 번이나 학교 밴드에서 쫓아냈다. 한 번은 정해진 패턴 대신 자기만의 필인을 즉흥적으로 추가했기 때문이었고, 또 한 번은 합주 중 친구와 잠시 장난을 쳤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 추방을 당한 날, 마이크는 케네디 앞에서 변명하지 않았다.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교실을 나선 뒤, 복도의 사물함을 한 번 강하게 발로 찼다. 쾅하는 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화성학 교사 카플린은 케네디와는 달랐다. 포트노이의 밴드 활동을 비웃지 않았고, 메트로놈 없이도 정확한 박자를 셀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아보았다. 카플린은 음계와 박자표, 조표, 모드, 악보 읽는 법을 차근차근 가르쳤고, 포트노이는 그 수업에서 학창 시절 통틀어 가장 좋은 점수를 받았다. 카플린은 종종 수업이 끝난 뒤 따로 불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이크, 너는 단순한 드러머가 아니다. 너는 전체 흐름을 볼 줄 알거든."
그러나 묘하게도, 매일 밤 드럼 의자에 앉을 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카플린의 격려가 아니라 케네디의 차가운 눈빛이었다. 너는 진짜 음악가가 될 수 없다는 그 한 문장이 매일 한 시간씩 더 오래 드럼 앞에 앉게 만들었다.
음악을 향한 확신이 단단해지던 그해 가을.
1984년 11월 16일 금요일. 11학년 교실의 나른한 오후 공기를 가른 것은 보건 교사 팻 린치의 낮지만 힘 있는 목소리였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현재를 잡아라. 삶은 한순간에, 아무런 예고 없이 변할 수 있단다."
린치 선생님은 칠판 앞에 서서 학생들의 얼굴을 한 명씩 둘러보았다.
"오늘 밤 집에 가면, 반드시 부모님을 안아드리고 사랑한다고 말하렴. 그게 언제 마지막이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뻔한 설교로 넘길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그날따라 그 목소리는 묘하게 의식을 붙잡았다. 어쩌면 6년 전 11살 생일의 기억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일주일 뒤에 떠나버린 한 사람의 마지막 미소를 그는 아직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 저녁, 어머니 안드레아 리오네는 거실에서 작은 여행 가방을 챙기고 있었다. 그날 밤 경비행기를 타고 애틀랜틱시티로 짧은 주말여행을 떠날 예정이었다. 여행 가방 옆에는 화장품 파우치와 가벼운 외투가 놓여 있었고, 그녀는 거울 앞에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머리를 매만지고 있었다. 포트노이는 친구들과 놀러 나갈 준비를 마치고 현관으로 향했다. 손잡이를 잡은 순간, 머릿속에서 린치 선생님의 목소리가 울렸다. 오늘 밤 집에 가면, 반드시 부모님을 안아드리고…
손잡이를 잡은 채 잠시 머뭇거렸다. 발걸음을 돌려 거실로 다시 들어갔다. 어머니는 거울 앞에서 마지막으로 립스틱을 바르고 있었다. 마이크는 등 뒤에 다가가 멈춰 섰다. 어머니가 거울 너머로 그를 발견하고 미소를 지었다.
"왜, 뭐 잊은 거 있어?"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어머니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평소라면 17살 사춘기 아들이 하지 않을 행동이었다. 어머니의 어깨가 살짝 굳었다가 풀어졌다.
"우리 아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야?"
잠시 그대로 있다가 어머니의 뺨에 입을 맞췄다.
"그냥요. 제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셨으면 해서요."
어머니가 거울 너머로 그를 다시 바라보았다.
쑥스러운 듯 웃어 보이던 그 표정이, 소년이 기억하는 어머니의 마지막 미소였다.
몇 시간 뒤, 애틀랜틱시티 해안가로 향하던 경비행기가 밤바다로 곤두박질쳤다.
탑승자 전원 사망.
'현재를 잡아라'는 반나절 만에 현실이 되어 소년의 세계를 산산조각 냈다. 6년 전 할아버지가 떠났고, 이제 어머니가 떠났다. 두 번째 상실은 첫 번째의 반복이자 잔인한 증폭이었다.
단 한 가지, 그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있었다. 자기 두 손과 두 발이 만들어내는 박자. 스틱이 북 가죽에 닿는 그 순간만큼은, 그 한 박자의 길이만큼은, 세상이 손아귀 안에 있었다. 그게 그가 확실히 가졌다고 느낄 수 있는 전부였다.
장례식이 끝난 뒤 학교로 돌아왔지만, 예전의 포트노이가 아니었다. 11학년의 마지막 몇 달과 12학년의 1년 동안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점심시간이면 친구들과 어울리는 대신 음악실 구석의 드럼 옆에 혼자 앉았고, 방과 후에는 곧장 집으로 돌아가 드럼 키트 앞에 앉았다.
강박은 박자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시야에 닿는 모든 사물을 정확한 자리에 배열하기 시작했다. 콘서트에 다녀온 모든 티켓을 모서리의 각이 맞게 차곡차곡 쌓았고, 그 위에 노트를 펴고 연주된 모든 곡의 세트리스트를 빠뜨리지 않고 적었다. 글자의 간격이 균등하지 않으면 한 페이지를 통째로 찢고 다시 적었다. 통제 불능의 바깥세상 대신, 자신의 규칙으로만 통치할 수 있는 비좁은 질서가 그 폐허 위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학교에서도 변화는 눈에 띄었다. 케네디는 더 이상 마이크를 표적으로 삼지 않았다. 수업 시간에 호명하지도, 밴드에서 쫓아내지도 않았다. 한때 대들 줄 알았던 록 키드가 어머니를 잃은 뒤 자기 안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것을. 그리고 그 침잠이 단순한 슬픔이 아니라, 더 단단한 무엇으로 변해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1985년 6월, 12학년 졸업식. 킹스 파크 고등학교 강당은 학생과 학부모들로 가득 찼다. 졸업가운을 입고 사각모를 쓴 졸업생들이 무대 앞쪽에 일렬로 앉아 있었고, 포트노이는 줄의 중간쯤에 앉아 있었다. 객석에는 아버지 하워드가 있었다.
식순의 마지막에서 음악 부문 시상이 진행되었다. 단상 위로 케네디가 올라왔다. 늘 입던 회색 양복 차림이었고, 손에는 봉투 하나를 들고 있었다. 그해 학교가 수여하는 가장 큰 음악 장학금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교내 음악 교과와 밴드 활동에서 가장 모범이 되는 학생에게 주어지는 것이었고, 포트노이는 자기가 그런 종류의 모범생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케네디가 봉투를 열었다.
"올해 킹스 파크 고등학교가 수여하는 음악 부문 최대 장학금의 수상자는..."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마이크 포트노이."
포트노이는 귀를 의심했다. 객석 어딘가에서 터져 나온 박수가 강당 전체로 퍼져나갔다. 옆에 앉은 친구가 어깨를 툭 치며 일어서라고 손짓했다. 좌석 사이의 좁은 통로를 따라 무대 쪽으로 걸어갔다. 단상 위로 올라가 케네디 앞에 섰을 때, 자기가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케네디는 봉투를 건넸다. 두 사람의 손이 잠시 닿았다. 마이크는 봉투를 받아들고 고개를 들어 케네디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케네디가 한 쪽 눈을 짧게 깜빡였다.
윙크였는지, 그저 눈 깜빡임이었는지 헷갈릴 만큼 미세한 움직임이었다. 케네디는 4년간 포트노이를 표적으로 삼아 망신을 주고, 학교 밴드에서 두 번이나 쫓아낸 인물이었다. 어머니를 잃은 뒤 1년 가까이 거의 말을 하지 않던 시간에도 위로의 말을 건넨 적이 없었다.
그것이 그만의 방식이었다. 잠재력을 품은 아이가 칭찬 속에서 시들어버리길 원하지 않았고, 아이가 가장 어두운 시간을 통과해 다른 쪽 끝에 도달할 때까지 섣부른 위로 대신 지켜보는 것. 그것이 케네디라는 교사가 학생을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마이크는 그 윙크에 어떻게 응답해야 할 지 몰랐다. 봉투를 두 손으로 꼭 쥔 채 짧게 고개를 숙이고 단상에서 내려왔다. 자리로 돌아와 앉은 손이 떨렸다. 내내 자기를 미워하는 줄 알았던 어른이 실은 가장 깊이 지켜봐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깨달음. 그게 18살의 마이크 포트노이에게 졸업식이 남긴, 장학금 봉투보다 큰 선물이었다.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온 포트노이는 책상에 앉아 버클리 음악대학의 입학 안내문을 들여다보았다. 입학 원서에 자기 이름을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마이클 스티븐 포트노이.'
펜끝이 종이 위를 천천히 미끄러졌다. 글자 하나하나를 일정한 간격으로, 같은 크기로, 정중앙에 적어 넣으며.
한이솔 씀
다음 편 바로가기
File :
n19555r40202.jpg (68 KB) download : 2
n19585r96848.jpg (96 KB) download : 1
위대한 뮤지션들의 탄생이라니 두근두근합니다 너무 재미있네요 | ||
View all posts (6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