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일 두 메탈헤드 청년의 도전과 성공기 6편
Wacken Open Air는 다른 유명 메탈 페스트와는 그 성격이나 성향이 상당히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매년 프랑스에서 열리는 Hell Fest는 벤 바르도가 2002년도 Fury Fest에서의 실패를 토대로 철저한 계획과 프랑스 정부의 지원으로 탄생한 페스트이고, Ozzy Fest는 오지 오스본이라는 인물의 능력과 인맥으로 만들어낸 산물이죠. 일본의 Loud Park 페스티발은 대기업의 절대적 후원으로 이루어진 메탈 페스트입니다.
Wacken Open Air는 메탈 팬들을 위한, 메탈 팬들에 위한, 메탈 팬들의 안식처 같은 곳으로 다른 페스트는 메탈헤드들이 참가에 의의를 둔다면, Wacken는 고향에 온 느낌이라고 할 정도로 메탈헤드들의 강력한 팬덤이 형성되어 있는 페스트입니다. 토마스 옌센과 홀거 휘브너는 단순히 우리들은 메탈음악으로 파티를 열고 싶었다라고 후에 감상을 남겼으니깐요.
고난과 역경을 떨쳐낸 그 두 설립자.
그들은 어떻게 변화되기를 원했을까요? 그 여섯 번째 이야기 시작합니다.
1. 1997년도 Wacken Open Air의 성공.
어쩌면 성공이라는 이름보다는 생존이라고 해야하는 것이 더 맞을지도 모릅니다. 토마스와 홀거는 1997년도의 Wacken Open Air가 살아남은 것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공을 돌렸지만, 그 중 유독 한 사람에게 큰 고마움을 보였습니다.
토마스 헤스 (Thomas Hess)
1997년도 Wacken Open Air가 성황리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게 된 것은 토마스 헤스라는 인물의 역할이 상당히 컸습니다 그는 독일 밴드 Böhse Onkelz 투어 매니저로 활동했던 인물이며, 그 전에 다양한 음악 축제 기획, 보안 담당으로 이름을 알렸던 인물이었죠. 특히 1997년도에 축제 보안을 완벽하게 담당했고, 대형 무대 설치와 로지스틱을 담당했던 인물입니다. 그동안 토마스 옌센과 홀거 휘브너가 모두 현장에 뛰어다니면서 정리하고 파악하고 했었지만, 1997년도부터는 전부는 아닐지라도 일부분은 분업화를 시도했습니다. 물론 토마스와 홀거가 직접 현장을 뛰어다닌 것은 마찬가지겠지만 말이죠. 1997년도의 성공은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 아닌 어떻게 보면 토마스 옌센과 홀거 휘브너의 공포를 이겨낸 산물이었고, 토마스와 홀거는 항상 1997년도에 대한 이야기를 담담하게 말을 했습니다.
2. 인프라와 시스템 구축
토마스 옌센과 홀거 휘브너는 1997년도 Wacken Opne Air가 끝나고 난 후, 스스로의 페스트에 대해서 철저하게 분석을 합니다. 무엇이 좋았고 무엇이 안좋았나? 그러다보니 그 둘은 인프라가 여전히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고, 축제를 무리없이 이끌어가야할 시스템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죠. 그래서 그 둘은 인프라와 시스템에 구축에 대해서 큰 비중을 두고 됩니다. 특히 토마스와 홀거에게는 악몽과 같은 1996년도의 대참사를 잊지 않기 위헤 부지의 대대적인 조사와 시스템을 구축하게 됩니다. 우베 트레데와 함께 농지에 대해 배수 시설에 대한 조사를 하고, 물이 어떻게 빠져 나가는지 어떻게 텐트동을 구축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조사를 하고 시스템을 구축하게 되었고, 무대 설치와 음향, 조명을 1997년보다 확실히 성능을 뛰어나게 만들 정도로 준비를 하게 됩니다.
티켓 판매에 대한 프로세스와 각 축제를 이끌어가야할 역할과 분업화를 할 수 있도록 체계화가 되어갔죠. 즉 이 둘은 이제 메탈음악이 좋아!라고 하는 철없던 소년에서 이것을 확실하게 사업화할 수 있는 비즈니스맨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토마스 옌센은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처음에는 단지 음악을 대표하고 멋진 메탈 파티를 갖는 것이 동기였다. 2~3년 후에야 우리는 이것을 직업으로 만들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되었고, 전문적으로 만들려면 전업으로, 풀타임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1997년도 이후 처음으로 이들은 현실적인 방안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 둘이 설립한 ICS라는 법인을 어떤 방향으로 그리고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지도 알게 되었죠. 이렇게 인프라와 시스템을 구축을 준비하던 시기에 하나의 소식이 그들에게 전달됩니다.
3. Nuclear Blast와 Century Media
함께 하고 싶다.
1997년도 이후 Wacken은 많은 언론과 미디어에 노출되었고, 특히나 메탈 음악 관련된 미디어에서도 1997년 Wacken Open Air에 대해서 대대적으로 보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레이블에 소속되어 있던 밴드들이 “독일 북부 작은 마을에 있는 메탈 페스트가 있는데, 진짜 분위기 개쩔게 좋다”라는 소문을 내게 되면서 레이블이 직접 움직이게 되었습니다.
사실 1997년도는 처음으로 토마스 옌센과 홀거 휘브너가 라인업 구축을 대폭으로 수정하게 된 시기입니다. 그 전까지는 전통 헤비메탈을 중심으로 스래쉬메탈 밴드들 등으로 라인업을 구축했지만. 1997년도에는 우리가 흔히 아는 블랙. 데스, 고딕메탈 밴드들까지 섭외를 했었죠. 이렇게 섭외를 한 이유는 부족한 예산이 문제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토마스와 홀거의 인식 변화가 컸습니다. 1997년 전에는 정통 헤비메탈 위주의 라인업을 구성했지만, 그 후로는 메탈이라는 전체 범주 안에 메탈음악을 수용할 수 있다라는 인식이 바뀌게 되면서 전반적으로 라인업을 수용하게 됩니다.
뉴클리어 블래스와 센츄리 미디어는 지난 토마스와 홀거의 행보에 주시했었고, 레이블에 소속되어 있던 밴드들에게 전언을 들었습니다.
“Wacken은 진짜다”
이 두 대형 레이블이 마음을 움직이게 했던 가장 큰 요인이 바로 Wacken의 가장 강력한 메탈팬덤 커뮤니티 형성이기도 했었습니다. 그리고 이 두 대형 레이블은 Wacken에게 파트너십 계약을 체결하게 됩니다.
토마스는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계약서를 받았는데 너무 얇아서 이게 진짜인가 싶었다.”
기본적인 내용은 부스운영, 현장 홍보였습니다.
여기서 잠깐!
보통 대형 페스트나 락페 경우, 레이블이 참가하게 될 경우, 레이블이 밴드 홍보나 레이블 홍보에 대해서 돈을 주고 페스트의 운영권한을 가져가는 것이 보통이죠. 소속 밴드들의 우선 배치나 헤드라이너 등을 가져오려는 요구사항도 관행처럼 있었죠. 그러나 Wacken은 달랐습니다. 레이블은 Wacken에 대한 브랜드를 인수할 생각이 없었고, 토마스나 홀거 역시 팔 생각이 없었죠. 무엇보다 레이블은 돈 문제에 대해서 크게 언급하지 않았고, 계약서 내에 형식적으로만 처리가 되었다라고 두 설립자가 회고했습니다. 그리고 그 두 레이블은 라인업에 대한 요구사항도 없었다고 회고했죠.
파트너십 계약이 거의 마무리되는 시점에 토마스와 홀거는 레이블의 관계자들을 데리고 축제를 진행하고자 하는 목축지 부지로 안내했습니다. 그리고 그 관계자들이 본 진흙으로 구성된 땅, 허름한 임시 구조물 그리고 무대에 있는 허술한 전기배선들. 그리고 레이블의 한 관계자가 이렇게 말을 했었죠.
“이게 바로 우리가 온 이유지?”
홀거 휘브너는 이 당시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우리가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느꼈다.”
4. 유통망을 확보한 Wacken
메탈계에서의 두 대형 레이블 Nuclear Blast와 Century Media와의 계약을 통해서 토마스와 홀거는 그 대형 레이블이 가지고 있는 유통 네트워크를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Wacken Open Air를 홍보할 수 있는 팜플렛을 무료로 발매하는 밴드들의 앨범에 동봉하여 홍보할 수 있도록 네트워크망을 확보하게 된거죠. 대형 레이블은 이 조건을 수락해줬고, 10만장 정도 Wacken Open Air 1998에 대한 홍보전단지가 뉴클리어 블래스트와 센츄리 미디어 발매 앨범을 통해서 무료 전단지가 나가게 된 겁니다.
“우리가 요구한 게 아니라 그들이 먼저 물어왔다.”
토마스 옌센과 홀거 휘브너는 이렇게 일관적으로 회고했습니다. 즉, 레이블이 Wacken을 알아서 홍보하고 있었고, “올해 날짜는 어떻게 돼?”라던가 “라인업 확정이 언제 돼?” 라는 질문을 두 설립자에게 문의했었고, 토마스나 홀거는 우리는 그거 할 돈 없다라고 선을 그었지만, 레이블은 이건 투자라는 답변을 했었다라고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토마스와 홀거는 자신이 저질렀던 Wacken Open Air는 더 이상 포기할 수 없는 축제라는 것을 이 시기에 다시 한 번 더 인식을 하게 되었죠. 어디서든 마음대로 메탈음악을 들을 수 없는 팬덤, 메탈음악을 열광적으로 공연하고 싶어하는 밴드들 그리고 메탈음악씬의 생존에 힘쓰고 있는 레이블. 홀거 휘브너는 이 시기를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1997년까지는 우리가 파티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1998년에 와서야 우리가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는 걸 인정했다.”
5. Wacken Open Air는 언제나 시험대
1998년도는 총 20,000여명이라는 어마어마한 관중 입장을 자랑했던 페스트였습니다. 이 당시 토마스 옌센은 1998년도를 이렇게 기억했죠.
“사람들이 우리를 믿고 오는 건 고마웠지만 이제는 실수하면 안 되는 숫자였다.”
그래서 1998년도 Wacken Open Air 전, 티켓 예매 현황을 파악하고 홀거 휘브너는 이제는 팬들의 이해를 바래서는 안된다라는 말과 함께 축제를 진행함에 따라 통제 조건을 구상하게 되었습니다. 1998년도 Wacken은 처음으로 적자가 나지 않는 가능성을 계산할 수 있었던 해로 토마스 옌센은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홀거 휘브너는 축제를 준비하면서 이렇게 기억했죠
““우리는 처음으로 안 된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는 하고 싶어도 예산도 없었고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안된다라는 말을 하기는 쉽지 않았지만, 이제는 통제를 해야 했고, 1997년도 이전처럼 오직 자신들의 운에 따라 축제를 진행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돈이 생겼다고 안심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돈이 얼마나 빨리 사라지는지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최대한 가능한 범위내에서의 예산을 편성했고, 팬들이 움직일 수 있는 동선을 모두 확보하기도 했습니다. 모든 것을 시스템화 시켜도 토마스와 홀거는 늘 불안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1997년도 이후 늘 언제나 하던 말이 있었습니다.
“Wacken Open Air는 우리 자신을 시험하는 시험대이다”
그들은 아직도 1996년의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작년에 잘했다고 올해도 잘할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라는 생각으로 늘 언제나 Wacken Open Air를 치르고 있습니다. 중요한 점은 이 시험은 관객이나 밴드가 아닌 늘 주최자로서 설립자로서의 자기 자신들 스스로에게 던지는 시험이었죠. Wacken Open Air가 왜 지상 최대의 메탈 페스트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지에 대한 가장 명확한 답이 아닐까라고 생각이 듭니다.
특히 토마스 옌센과 홀거 휘브너는 마을과의 의사소통을 가장 적극적으로 한 해가 1998년도라고 할 정도로 1998년도에는 Wackne Open Air라는 축제가 아닌 Wacken 마을 전체에 큰 이익과 수익을 안겨다 준 해이기도 했습니다. 이 시점에 마을 주민의 허가 단계가 아닌 협력 단계 구조로 발전하게 된 계기가 되죠. 주민들에게 하루 무료 입장권을 배포해서 메탈음악과 메탈헤드들의 놀이 문화를 이해시키려고 했다던가, 지역 인프라 개선 협력을 공유하고, 주민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렴하기도 했던 시기였습니다. 특히 마을 마트나 상점가에서 판매될 수 있도록 하기도 하고, Wacken Open Air 축제 내부에서 마을 주민들이 직접 물품을 판매하거나 음식, 음료등을 판매할 수 있도록 협력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토마스와 홀거는 언제나 이 무대는 우리들을 위한 시험대라고 말하고 다녔습니다. 무엇보다 돈이 없어서 이 축제를 못하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혹은 폭우나 자연재해로 인해 이 축제가 망할 거라고 늘 생각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생각하고 최악의 시나리오를 생각하면서 축제를 기획했습니다.
“우리는 관객에게 시험받는 게 아니라 스스로에게 시험을 치른다.”
매년 그들이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약속한 것을 지켰는가?
작년보다 편해졌다는 이유로 방심하지 않았는가?
마을을 존중했는가?
팬을 고객으로만 대하지 않았는가?
돈이 기준이 되지 않았는가?
다음편은 마지막 이야기로 마무리 지을까 합니다.

Wacken Open Air는 메탈 팬들을 위한, 메탈 팬들에 위한, 메탈 팬들의 안식처 같은 곳으로 다른 페스트는 메탈헤드들이 참가에 의의를 둔다면, Wacken는 고향에 온 느낌이라고 할 정도로 메탈헤드들의 강력한 팬덤이 형성되어 있는 페스트입니다. 토마스 옌센과 홀거 휘브너는 단순히 우리들은 메탈음악으로 파티를 열고 싶었다라고 후에 감상을 남겼으니깐요.
고난과 역경을 떨쳐낸 그 두 설립자.
그들은 어떻게 변화되기를 원했을까요? 그 여섯 번째 이야기 시작합니다.
1. 1997년도 Wacken Open Air의 성공.
어쩌면 성공이라는 이름보다는 생존이라고 해야하는 것이 더 맞을지도 모릅니다. 토마스와 홀거는 1997년도의 Wacken Open Air가 살아남은 것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공을 돌렸지만, 그 중 유독 한 사람에게 큰 고마움을 보였습니다.
토마스 헤스 (Thomas Hess)
1997년도 Wacken Open Air가 성황리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게 된 것은 토마스 헤스라는 인물의 역할이 상당히 컸습니다 그는 독일 밴드 Böhse Onkelz 투어 매니저로 활동했던 인물이며, 그 전에 다양한 음악 축제 기획, 보안 담당으로 이름을 알렸던 인물이었죠. 특히 1997년도에 축제 보안을 완벽하게 담당했고, 대형 무대 설치와 로지스틱을 담당했던 인물입니다. 그동안 토마스 옌센과 홀거 휘브너가 모두 현장에 뛰어다니면서 정리하고 파악하고 했었지만, 1997년도부터는 전부는 아닐지라도 일부분은 분업화를 시도했습니다. 물론 토마스와 홀거가 직접 현장을 뛰어다닌 것은 마찬가지겠지만 말이죠. 1997년도의 성공은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 아닌 어떻게 보면 토마스 옌센과 홀거 휘브너의 공포를 이겨낸 산물이었고, 토마스와 홀거는 항상 1997년도에 대한 이야기를 담담하게 말을 했습니다.
2. 인프라와 시스템 구축
토마스 옌센과 홀거 휘브너는 1997년도 Wacken Opne Air가 끝나고 난 후, 스스로의 페스트에 대해서 철저하게 분석을 합니다. 무엇이 좋았고 무엇이 안좋았나? 그러다보니 그 둘은 인프라가 여전히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고, 축제를 무리없이 이끌어가야할 시스템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죠. 그래서 그 둘은 인프라와 시스템에 구축에 대해서 큰 비중을 두고 됩니다. 특히 토마스와 홀거에게는 악몽과 같은 1996년도의 대참사를 잊지 않기 위헤 부지의 대대적인 조사와 시스템을 구축하게 됩니다. 우베 트레데와 함께 농지에 대해 배수 시설에 대한 조사를 하고, 물이 어떻게 빠져 나가는지 어떻게 텐트동을 구축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조사를 하고 시스템을 구축하게 되었고, 무대 설치와 음향, 조명을 1997년보다 확실히 성능을 뛰어나게 만들 정도로 준비를 하게 됩니다.
티켓 판매에 대한 프로세스와 각 축제를 이끌어가야할 역할과 분업화를 할 수 있도록 체계화가 되어갔죠. 즉 이 둘은 이제 메탈음악이 좋아!라고 하는 철없던 소년에서 이것을 확실하게 사업화할 수 있는 비즈니스맨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토마스 옌센은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처음에는 단지 음악을 대표하고 멋진 메탈 파티를 갖는 것이 동기였다. 2~3년 후에야 우리는 이것을 직업으로 만들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되었고, 전문적으로 만들려면 전업으로, 풀타임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1997년도 이후 처음으로 이들은 현실적인 방안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 둘이 설립한 ICS라는 법인을 어떤 방향으로 그리고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지도 알게 되었죠. 이렇게 인프라와 시스템을 구축을 준비하던 시기에 하나의 소식이 그들에게 전달됩니다.
3. Nuclear Blast와 Century Media
함께 하고 싶다.
1997년도 이후 Wacken은 많은 언론과 미디어에 노출되었고, 특히나 메탈 음악 관련된 미디어에서도 1997년 Wacken Open Air에 대해서 대대적으로 보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레이블에 소속되어 있던 밴드들이 “독일 북부 작은 마을에 있는 메탈 페스트가 있는데, 진짜 분위기 개쩔게 좋다”라는 소문을 내게 되면서 레이블이 직접 움직이게 되었습니다.
사실 1997년도는 처음으로 토마스 옌센과 홀거 휘브너가 라인업 구축을 대폭으로 수정하게 된 시기입니다. 그 전까지는 전통 헤비메탈을 중심으로 스래쉬메탈 밴드들 등으로 라인업을 구축했지만. 1997년도에는 우리가 흔히 아는 블랙. 데스, 고딕메탈 밴드들까지 섭외를 했었죠. 이렇게 섭외를 한 이유는 부족한 예산이 문제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토마스와 홀거의 인식 변화가 컸습니다. 1997년 전에는 정통 헤비메탈 위주의 라인업을 구성했지만, 그 후로는 메탈이라는 전체 범주 안에 메탈음악을 수용할 수 있다라는 인식이 바뀌게 되면서 전반적으로 라인업을 수용하게 됩니다.
뉴클리어 블래스와 센츄리 미디어는 지난 토마스와 홀거의 행보에 주시했었고, 레이블에 소속되어 있던 밴드들에게 전언을 들었습니다.
“Wacken은 진짜다”
이 두 대형 레이블이 마음을 움직이게 했던 가장 큰 요인이 바로 Wacken의 가장 강력한 메탈팬덤 커뮤니티 형성이기도 했었습니다. 그리고 이 두 대형 레이블은 Wacken에게 파트너십 계약을 체결하게 됩니다.
토마스는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계약서를 받았는데 너무 얇아서 이게 진짜인가 싶었다.”
기본적인 내용은 부스운영, 현장 홍보였습니다.
여기서 잠깐!
보통 대형 페스트나 락페 경우, 레이블이 참가하게 될 경우, 레이블이 밴드 홍보나 레이블 홍보에 대해서 돈을 주고 페스트의 운영권한을 가져가는 것이 보통이죠. 소속 밴드들의 우선 배치나 헤드라이너 등을 가져오려는 요구사항도 관행처럼 있었죠. 그러나 Wacken은 달랐습니다. 레이블은 Wacken에 대한 브랜드를 인수할 생각이 없었고, 토마스나 홀거 역시 팔 생각이 없었죠. 무엇보다 레이블은 돈 문제에 대해서 크게 언급하지 않았고, 계약서 내에 형식적으로만 처리가 되었다라고 두 설립자가 회고했습니다. 그리고 그 두 레이블은 라인업에 대한 요구사항도 없었다고 회고했죠.
파트너십 계약이 거의 마무리되는 시점에 토마스와 홀거는 레이블의 관계자들을 데리고 축제를 진행하고자 하는 목축지 부지로 안내했습니다. 그리고 그 관계자들이 본 진흙으로 구성된 땅, 허름한 임시 구조물 그리고 무대에 있는 허술한 전기배선들. 그리고 레이블의 한 관계자가 이렇게 말을 했었죠.
“이게 바로 우리가 온 이유지?”
홀거 휘브너는 이 당시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우리가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느꼈다.”
4. 유통망을 확보한 Wacken
메탈계에서의 두 대형 레이블 Nuclear Blast와 Century Media와의 계약을 통해서 토마스와 홀거는 그 대형 레이블이 가지고 있는 유통 네트워크를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Wacken Open Air를 홍보할 수 있는 팜플렛을 무료로 발매하는 밴드들의 앨범에 동봉하여 홍보할 수 있도록 네트워크망을 확보하게 된거죠. 대형 레이블은 이 조건을 수락해줬고, 10만장 정도 Wacken Open Air 1998에 대한 홍보전단지가 뉴클리어 블래스트와 센츄리 미디어 발매 앨범을 통해서 무료 전단지가 나가게 된 겁니다.
“우리가 요구한 게 아니라 그들이 먼저 물어왔다.”
토마스 옌센과 홀거 휘브너는 이렇게 일관적으로 회고했습니다. 즉, 레이블이 Wacken을 알아서 홍보하고 있었고, “올해 날짜는 어떻게 돼?”라던가 “라인업 확정이 언제 돼?” 라는 질문을 두 설립자에게 문의했었고, 토마스나 홀거는 우리는 그거 할 돈 없다라고 선을 그었지만, 레이블은 이건 투자라는 답변을 했었다라고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토마스와 홀거는 자신이 저질렀던 Wacken Open Air는 더 이상 포기할 수 없는 축제라는 것을 이 시기에 다시 한 번 더 인식을 하게 되었죠. 어디서든 마음대로 메탈음악을 들을 수 없는 팬덤, 메탈음악을 열광적으로 공연하고 싶어하는 밴드들 그리고 메탈음악씬의 생존에 힘쓰고 있는 레이블. 홀거 휘브너는 이 시기를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1997년까지는 우리가 파티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1998년에 와서야 우리가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는 걸 인정했다.”
5. Wacken Open Air는 언제나 시험대
1998년도는 총 20,000여명이라는 어마어마한 관중 입장을 자랑했던 페스트였습니다. 이 당시 토마스 옌센은 1998년도를 이렇게 기억했죠.
“사람들이 우리를 믿고 오는 건 고마웠지만 이제는 실수하면 안 되는 숫자였다.”
그래서 1998년도 Wacken Open Air 전, 티켓 예매 현황을 파악하고 홀거 휘브너는 이제는 팬들의 이해를 바래서는 안된다라는 말과 함께 축제를 진행함에 따라 통제 조건을 구상하게 되었습니다. 1998년도 Wacken은 처음으로 적자가 나지 않는 가능성을 계산할 수 있었던 해로 토마스 옌센은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홀거 휘브너는 축제를 준비하면서 이렇게 기억했죠
““우리는 처음으로 안 된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는 하고 싶어도 예산도 없었고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안된다라는 말을 하기는 쉽지 않았지만, 이제는 통제를 해야 했고, 1997년도 이전처럼 오직 자신들의 운에 따라 축제를 진행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돈이 생겼다고 안심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돈이 얼마나 빨리 사라지는지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최대한 가능한 범위내에서의 예산을 편성했고, 팬들이 움직일 수 있는 동선을 모두 확보하기도 했습니다. 모든 것을 시스템화 시켜도 토마스와 홀거는 늘 불안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1997년도 이후 늘 언제나 하던 말이 있었습니다.
“Wacken Open Air는 우리 자신을 시험하는 시험대이다”
그들은 아직도 1996년의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작년에 잘했다고 올해도 잘할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라는 생각으로 늘 언제나 Wacken Open Air를 치르고 있습니다. 중요한 점은 이 시험은 관객이나 밴드가 아닌 늘 주최자로서 설립자로서의 자기 자신들 스스로에게 던지는 시험이었죠. Wacken Open Air가 왜 지상 최대의 메탈 페스트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지에 대한 가장 명확한 답이 아닐까라고 생각이 듭니다.
특히 토마스 옌센과 홀거 휘브너는 마을과의 의사소통을 가장 적극적으로 한 해가 1998년도라고 할 정도로 1998년도에는 Wackne Open Air라는 축제가 아닌 Wacken 마을 전체에 큰 이익과 수익을 안겨다 준 해이기도 했습니다. 이 시점에 마을 주민의 허가 단계가 아닌 협력 단계 구조로 발전하게 된 계기가 되죠. 주민들에게 하루 무료 입장권을 배포해서 메탈음악과 메탈헤드들의 놀이 문화를 이해시키려고 했다던가, 지역 인프라 개선 협력을 공유하고, 주민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렴하기도 했던 시기였습니다. 특히 마을 마트나 상점가에서 판매될 수 있도록 하기도 하고, Wacken Open Air 축제 내부에서 마을 주민들이 직접 물품을 판매하거나 음식, 음료등을 판매할 수 있도록 협력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토마스와 홀거는 언제나 이 무대는 우리들을 위한 시험대라고 말하고 다녔습니다. 무엇보다 돈이 없어서 이 축제를 못하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혹은 폭우나 자연재해로 인해 이 축제가 망할 거라고 늘 생각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생각하고 최악의 시나리오를 생각하면서 축제를 기획했습니다.
“우리는 관객에게 시험받는 게 아니라 스스로에게 시험을 치른다.”
매년 그들이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약속한 것을 지켰는가?
작년보다 편해졌다는 이유로 방심하지 않았는가?
마을을 존중했는가?
팬을 고객으로만 대하지 않았는가?
돈이 기준이 되지 않았는가?
다음편은 마지막 이야기로 마무리 지을까 합니다.

Wacken Open Air 1998 라인업

Wacken Open Air 1998 홍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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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블과 관계를 정립했다니, 자리를 잡기 시작하나봐요. 마지막 이야기는 긴장하지 않고 기다려도 되겠습니다 ㅎㅎ | ||
엄청난 양의 연재물 대단하십니다 | ||
잘 보고 있습니다. 환상의 라인업이네요. | ||
드디어 안정기..ㅠㅠ 다음이 마지막 편이라니 아쉬우면서도 기대됩니다! | ||
레이블하고 계약하는 것까지도 드라마틱하네요. 이제 마지막이 다가온다니 아쉽습니다. ㅠ | ||
잘 봤습니다...다음 편이 마지막이라니 아쉽네요...!!! | ||
너무 너무 재미있어요 | ||
98년 라인업도 어마어마 하네요 ㄷㄷㄷ 좋은 글 감사합니다~ | ||
재미있네요 이런 지식들은 어디서 얻는지 궁금해질 정도입니다 | ||
▶ 독일 두 메탈헤드 청년의 도전과 성공기 6편 [9] 

2026-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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