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일 두 메탈헤드 청년의 도전과 성공기 3편
본인들의 회고록에서 그들은 항상 말을 했습니다.
진짜 매년이 영광이자 공포였으며 절망이었다고. 그럼에도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포기하고싶은 유혹도 있었습니다. 친했던 친구들이 등을 돌리고, 마을주민들은 더더욱 냉담해졌고, 감당할 수 없는 빚으로 매 순간이 살얼음판이었으니깐요. 그러나 그들은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토마스 옌센과 홀거 휘브너, 처절했던 도전기 그 세 번째 이야기 시작합니다.
1996년도는 이들에게는 끔찍했던 재앙의 해였습니다.
1996년도 이야기를 하기 전, 1993년도부터 1995년도까지의 토마스 옌센과 홀거 휘브너의 이야기를 안할 수 없겠네요. 끔찍했던 재앙의 해를 맞이하기도 전에 그 둘은 이미 모든 것이 부서져 있었으니깐요.
1993년도 3,500여명의 관중을 동원한 해로서 이들은 더더욱 가능성을 보았던 해이지만 토마스 옌센에게는 엄청난 슬픔의 해이기도 했었습니다. 그가 하는 마을 축제를 키우려고 했던 노력에 말없이 도와줬던 조력자이자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던 어머니가 축제을 하기 3달 전 별세했었습니다. 토마스 옌센은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슬퍼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더더욱 축제 성공을 위해 축제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죠. 가족의 모든 돈을 걸었던 두 청년. 그 중 토마스는 항상 자기를 믿어줬던 어머니마저 떠나보낸 상황이었습니다. 그 둘은 그렇게 1993년도 Wacken Open Air에서 Doro Pesch와 Fates Warning을 섭외하고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여전히 어마어마한 부채에 시달렸죠. 그럼에도 그들은 1994년도에 폴 디아노의 Killers, Gamma Ray등을 헤드라이너로 세우면서 그 전보다 많은 4,500여명의 관중을 군집 시켰습니다.
그러나 모든 축제가 끝나고 사람들이 자기들의 집으로 향해가는 그 이후 토마스 옌센과 홀거 휘브너는 마을 주민들의 모든 비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축제 이후 발생한 쓰레기와 망가진 목축지, 어머어마한 소음으로 인한 마을 주민들의 불편등에 말이죠.
토마스 옌센은 “인생에서 가장 슬픈 일이 일어났음에도 삶을 계속되어야 했다”라고 회상했습니다. 1993년도와 1994년도는 그들에게는 다운되기 일보직전인 복서와 같은 상황이었죠. 모든 축제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즐거웠던 메탈축제가 남긴 돈, 35만 마르크(현재 한화 가치 3억 5천). 그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랐던 동네 사람들의 냉담했던 반응뿐이었죠. 특히 1994년도는 그 축제를 같이 했던 친구들이 모두 떠나갔던 해이기도 했습니다. 진짜 토마스 옌센과 홀거 휘브너 단 둘만 남은 상황이었고, 이 둘은 진짜 절망적인 해였다고 회고했습니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다.
토마스 옌센은 포기할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메탈 축제가 끝나고 돌아가는 팬들이 ‘내년에도 또 오겠다’라는 말을 했었기에. 그 둘은 이제 진짜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했습니다. 토마스 옌센은 베이시스트였고, 그로 인해 악기점에서 일을 하고 남는 시간에 기타와 베이스 레슨을 했고, 밤에는 클럽공연에서 장비를 나르고 로드 매니저 역할까지 했었습니다. 홀거 휘브너는 밤에는 클럽 DJ를 하고 낮에는 화물 운송을 하면서 배달부 일도 했었죠. 그렇게 벌었던 돈. 그들은 밴드들의 계약금으로 모두 송금했었기에 그들은 자기들의 벌었던 돈을 만져보지도 못했습니다. 사무실에서 있던 전화요금도 몇 개월째 미납되어서 전화는 쓸 수도 없었죠. 농번기가 되면 토마스와 홀거는 Wacken으로 달려가 농촌 일도 도왔습니다. 특히 소음과 동네 분위기를 어지럽혔던 보상으로 인해 무보수 일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남을 때 다음 해 Wacken Open Air의 홍보 전단지를 독일 전지역을 돌아다니면서 홍보에 몰두했었습니다. 오죽 돈이 없었으면 며칠 굶기도 했고, 때론 친한 지인들에게 밥을 얻어먹기도 했었죠. 난방이 되지 않은 사무실에 두꺼운 외투를 입으면서 일을 하고, 가장 저렴한 빵과 소시지로만 끼니를 해결했었죠.
그럼에도 1995년도 그들은 라인업을 확장했습니다. 돈도 없었고, 가진 것이라고는 메탈정신만 가득했던 그 둘. 그렇지만 포기하고 싶지 않았기에 라인업을 늘렸습니다. 직접 잡지사에게 편지를 보내고 홍보를 했었죠. 1995년 Wacken Open Air 당시 독일 로컬 밴드들에게 숙박비용을 지불할 수 없어서 어렵게 자기들 집에서 머무르면 안되냐라는 말까지 하기도 했었습니다. 작년보다 더 늘어난 4,500여명 관중 수. 그래도 그 시기 이미 수많은 부채를 떠안은 상태였고, 밴드들에게 개런티마저 지불하지 못해 “우리가 지금 당장 돈을 줄 수 없지만, 개런티 비용은 어떻게든 갚겠다”라고 말하며 밴드들을 돌려보냈습니다. 그래도 가능성을 보았던 그 둘에게는 장밋빛 미래가 보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1996년도 Wacken Open Air, 끔직했던 재앙
그렇게 절치부심으로 1996년도 Wacken Open Air를 진행했습니다. 그들은 수익이 날때까지 단 한 푼의 월급조차 쥐여보지 못한 채 1996년도 Wacken Open Air를 기획했습니다. 그 당시 헤드라이너는 독일 최고 인기 밴드였던 Böhse Onkelz. 그들은 이 밴드에게 모든 승부수를 걸었습니다. 밴드 섭외도 쉽지 않았지만, 독일 내에서 어마어마한 팬덤을 보유했던 밴드이기에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을거라고 보고 있었죠.
그러나, 하늘은 토마스 옌센과 홀거 휘브너를 도와주지 못했습니다.
Wacken Open Air가 되기 하루 전, Wacken 지역에 엄청난 폭우가 쏟아져 내리면서 목축지 일대는 모두 진흙바닥으로 변했고, 땅속에 있던 소 배설물등이 땅 밖으로 나오게 되었죠. 토마스 옌센과 홀거 휘브너 단 둘은 축제 기획으로 잠을 자지 못했던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그날 저녁부터 그 다음날 사람들이 몰려오기 전까지 트랙터를 끌고 땅을 골라내고, 소 배설물을 치우고 있었습니다. 비옷 입은 모습에 누가봐도 처량한 두 설립자는 그 상태에서 입장하는 관중들에게 티켓을 받고 관중들 입장을 도왔습니다. 10,000여명의 관중 수. 토마스 옌센은 회고 인터뷰에서 그 시기는 우리에게 영광의 해이기도 했지만, 재앙 같은 해이기도 했다라고 말을 했을 정도로 첫 10,000여명 관중이 방문했습니다. 하지만 이 많은 관중들을 수용할 수 있는 텐트도 부족했고, 하수시설, 화장실 모든 것이 부족 했었던 그 당시 Wacken. 이미 진흙으로 되어 있는 공연장, 거기에 소 배설물로 인해 심각한 악취가 나고 있었고, 이에 따른 관중들의 불만은 극에 치닫고 있었습니다. 특히 차들은 모두 진흙탕에 빠져서 허우적거렸고, 두 설립자는 24시간 트랙터를 몰면서 차들을 꺼내는 역할을 했었죠. 뿐만 아니라 Böhse Onkelz는 80년대 말부터 극우적 행보를 보였던 밴드로 독일 내부에서 민감한 말들이 나왔고, 나치 주의 밴드를 불렀다라는 이유로 정치적 문제에 휩싸이기도 했습니다. 거기에 Böhse Onkelz의 팬덤들과 일반 메탈헤드들의 심각한 대립 신경전도 나오고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통제 불능 상황이 되면서 치안문제, 통제 상실 등 어마어마한 문제만 남겼습니다.
성공했지만 실패했다.
토마스 옌센은 관객은 많이 왔지만, 현장 수습 비용과 민원 처리, 시설 복구 비용이 다시 눈덩이처럼 불어났습니다. 훗날 "사람은 많이 왔는데, 축제가 끝난 후 현장을 보니 차라리 망하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처참했다"고 회상했습니다. 특히 토마스는 구름처럼 몰려오는 관중들을 보고 기뻐하던 것도 잠시, 곧바로 공포를 느꼈었다고 회상했었죠. 홀거 휘브너 역시나 "당시 현장은 전쟁터와 다름없었습니다. 트랙터 수십 대가 24시간 내내 진흙에 빠진 차들을 견인해야 했죠. 주민들은 화가 나 있었고, 현장은 아수라장이었습니다.”라고 회고했었죠.
그렇게 모든 축제가 끝나고 난 후, 그들은 모든 정산을 마쳤지만, 정말 암담했습니다. 분명 수익은 늘었지만, 밴드의 개런티 비용, 목축지 복원비용, 거기에 쓰레기 처리비용까지 들어가야할 비용은 수익보다 더 많이 지출을 해야했기 때문이었죠.
토마스 옌센의 회고
"1996년 축제 마지막 날 밤, 나는 사무실 구석에 앉아 울고 싶었습니다. 관객들은 환호하고 있었지만, 나는 내일 아침에 닥칠 청구서들을 어떻게 막아야 할지 몰랐거든요. 그때는 정말로 **'이게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늘은 이들에게 당장 죽어라!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이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1996년도 Wacken Open Air가 모두 끝나고 토마스 옌센과 홀거 휘브너에게 진짜 한줄기의 빛이 되어준 그리고 희망이라는 것이 남아 있구나라는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다음편에 계속

진짜 매년이 영광이자 공포였으며 절망이었다고. 그럼에도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포기하고싶은 유혹도 있었습니다. 친했던 친구들이 등을 돌리고, 마을주민들은 더더욱 냉담해졌고, 감당할 수 없는 빚으로 매 순간이 살얼음판이었으니깐요. 그러나 그들은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토마스 옌센과 홀거 휘브너, 처절했던 도전기 그 세 번째 이야기 시작합니다.
1996년도는 이들에게는 끔찍했던 재앙의 해였습니다.
1996년도 이야기를 하기 전, 1993년도부터 1995년도까지의 토마스 옌센과 홀거 휘브너의 이야기를 안할 수 없겠네요. 끔찍했던 재앙의 해를 맞이하기도 전에 그 둘은 이미 모든 것이 부서져 있었으니깐요.
1993년도 3,500여명의 관중을 동원한 해로서 이들은 더더욱 가능성을 보았던 해이지만 토마스 옌센에게는 엄청난 슬픔의 해이기도 했었습니다. 그가 하는 마을 축제를 키우려고 했던 노력에 말없이 도와줬던 조력자이자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던 어머니가 축제을 하기 3달 전 별세했었습니다. 토마스 옌센은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슬퍼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더더욱 축제 성공을 위해 축제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죠. 가족의 모든 돈을 걸었던 두 청년. 그 중 토마스는 항상 자기를 믿어줬던 어머니마저 떠나보낸 상황이었습니다. 그 둘은 그렇게 1993년도 Wacken Open Air에서 Doro Pesch와 Fates Warning을 섭외하고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여전히 어마어마한 부채에 시달렸죠. 그럼에도 그들은 1994년도에 폴 디아노의 Killers, Gamma Ray등을 헤드라이너로 세우면서 그 전보다 많은 4,500여명의 관중을 군집 시켰습니다.
그러나 모든 축제가 끝나고 사람들이 자기들의 집으로 향해가는 그 이후 토마스 옌센과 홀거 휘브너는 마을 주민들의 모든 비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축제 이후 발생한 쓰레기와 망가진 목축지, 어머어마한 소음으로 인한 마을 주민들의 불편등에 말이죠.
토마스 옌센은 “인생에서 가장 슬픈 일이 일어났음에도 삶을 계속되어야 했다”라고 회상했습니다. 1993년도와 1994년도는 그들에게는 다운되기 일보직전인 복서와 같은 상황이었죠. 모든 축제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즐거웠던 메탈축제가 남긴 돈, 35만 마르크(현재 한화 가치 3억 5천). 그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랐던 동네 사람들의 냉담했던 반응뿐이었죠. 특히 1994년도는 그 축제를 같이 했던 친구들이 모두 떠나갔던 해이기도 했습니다. 진짜 토마스 옌센과 홀거 휘브너 단 둘만 남은 상황이었고, 이 둘은 진짜 절망적인 해였다고 회고했습니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다.
토마스 옌센은 포기할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메탈 축제가 끝나고 돌아가는 팬들이 ‘내년에도 또 오겠다’라는 말을 했었기에. 그 둘은 이제 진짜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했습니다. 토마스 옌센은 베이시스트였고, 그로 인해 악기점에서 일을 하고 남는 시간에 기타와 베이스 레슨을 했고, 밤에는 클럽공연에서 장비를 나르고 로드 매니저 역할까지 했었습니다. 홀거 휘브너는 밤에는 클럽 DJ를 하고 낮에는 화물 운송을 하면서 배달부 일도 했었죠. 그렇게 벌었던 돈. 그들은 밴드들의 계약금으로 모두 송금했었기에 그들은 자기들의 벌었던 돈을 만져보지도 못했습니다. 사무실에서 있던 전화요금도 몇 개월째 미납되어서 전화는 쓸 수도 없었죠. 농번기가 되면 토마스와 홀거는 Wacken으로 달려가 농촌 일도 도왔습니다. 특히 소음과 동네 분위기를 어지럽혔던 보상으로 인해 무보수 일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남을 때 다음 해 Wacken Open Air의 홍보 전단지를 독일 전지역을 돌아다니면서 홍보에 몰두했었습니다. 오죽 돈이 없었으면 며칠 굶기도 했고, 때론 친한 지인들에게 밥을 얻어먹기도 했었죠. 난방이 되지 않은 사무실에 두꺼운 외투를 입으면서 일을 하고, 가장 저렴한 빵과 소시지로만 끼니를 해결했었죠.
그럼에도 1995년도 그들은 라인업을 확장했습니다. 돈도 없었고, 가진 것이라고는 메탈정신만 가득했던 그 둘. 그렇지만 포기하고 싶지 않았기에 라인업을 늘렸습니다. 직접 잡지사에게 편지를 보내고 홍보를 했었죠. 1995년 Wacken Open Air 당시 독일 로컬 밴드들에게 숙박비용을 지불할 수 없어서 어렵게 자기들 집에서 머무르면 안되냐라는 말까지 하기도 했었습니다. 작년보다 더 늘어난 4,500여명 관중 수. 그래도 그 시기 이미 수많은 부채를 떠안은 상태였고, 밴드들에게 개런티마저 지불하지 못해 “우리가 지금 당장 돈을 줄 수 없지만, 개런티 비용은 어떻게든 갚겠다”라고 말하며 밴드들을 돌려보냈습니다. 그래도 가능성을 보았던 그 둘에게는 장밋빛 미래가 보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1996년도 Wacken Open Air, 끔직했던 재앙
그렇게 절치부심으로 1996년도 Wacken Open Air를 진행했습니다. 그들은 수익이 날때까지 단 한 푼의 월급조차 쥐여보지 못한 채 1996년도 Wacken Open Air를 기획했습니다. 그 당시 헤드라이너는 독일 최고 인기 밴드였던 Böhse Onkelz. 그들은 이 밴드에게 모든 승부수를 걸었습니다. 밴드 섭외도 쉽지 않았지만, 독일 내에서 어마어마한 팬덤을 보유했던 밴드이기에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을거라고 보고 있었죠.
그러나, 하늘은 토마스 옌센과 홀거 휘브너를 도와주지 못했습니다.
Wacken Open Air가 되기 하루 전, Wacken 지역에 엄청난 폭우가 쏟아져 내리면서 목축지 일대는 모두 진흙바닥으로 변했고, 땅속에 있던 소 배설물등이 땅 밖으로 나오게 되었죠. 토마스 옌센과 홀거 휘브너 단 둘은 축제 기획으로 잠을 자지 못했던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그날 저녁부터 그 다음날 사람들이 몰려오기 전까지 트랙터를 끌고 땅을 골라내고, 소 배설물을 치우고 있었습니다. 비옷 입은 모습에 누가봐도 처량한 두 설립자는 그 상태에서 입장하는 관중들에게 티켓을 받고 관중들 입장을 도왔습니다. 10,000여명의 관중 수. 토마스 옌센은 회고 인터뷰에서 그 시기는 우리에게 영광의 해이기도 했지만, 재앙 같은 해이기도 했다라고 말을 했을 정도로 첫 10,000여명 관중이 방문했습니다. 하지만 이 많은 관중들을 수용할 수 있는 텐트도 부족했고, 하수시설, 화장실 모든 것이 부족 했었던 그 당시 Wacken. 이미 진흙으로 되어 있는 공연장, 거기에 소 배설물로 인해 심각한 악취가 나고 있었고, 이에 따른 관중들의 불만은 극에 치닫고 있었습니다. 특히 차들은 모두 진흙탕에 빠져서 허우적거렸고, 두 설립자는 24시간 트랙터를 몰면서 차들을 꺼내는 역할을 했었죠. 뿐만 아니라 Böhse Onkelz는 80년대 말부터 극우적 행보를 보였던 밴드로 독일 내부에서 민감한 말들이 나왔고, 나치 주의 밴드를 불렀다라는 이유로 정치적 문제에 휩싸이기도 했습니다. 거기에 Böhse Onkelz의 팬덤들과 일반 메탈헤드들의 심각한 대립 신경전도 나오고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통제 불능 상황이 되면서 치안문제, 통제 상실 등 어마어마한 문제만 남겼습니다.
성공했지만 실패했다.
토마스 옌센은 관객은 많이 왔지만, 현장 수습 비용과 민원 처리, 시설 복구 비용이 다시 눈덩이처럼 불어났습니다. 훗날 "사람은 많이 왔는데, 축제가 끝난 후 현장을 보니 차라리 망하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처참했다"고 회상했습니다. 특히 토마스는 구름처럼 몰려오는 관중들을 보고 기뻐하던 것도 잠시, 곧바로 공포를 느꼈었다고 회상했었죠. 홀거 휘브너 역시나 "당시 현장은 전쟁터와 다름없었습니다. 트랙터 수십 대가 24시간 내내 진흙에 빠진 차들을 견인해야 했죠. 주민들은 화가 나 있었고, 현장은 아수라장이었습니다.”라고 회고했었죠.
그렇게 모든 축제가 끝나고 난 후, 그들은 모든 정산을 마쳤지만, 정말 암담했습니다. 분명 수익은 늘었지만, 밴드의 개런티 비용, 목축지 복원비용, 거기에 쓰레기 처리비용까지 들어가야할 비용은 수익보다 더 많이 지출을 해야했기 때문이었죠.
토마스 옌센의 회고
"1996년 축제 마지막 날 밤, 나는 사무실 구석에 앉아 울고 싶었습니다. 관객들은 환호하고 있었지만, 나는 내일 아침에 닥칠 청구서들을 어떻게 막아야 할지 몰랐거든요. 그때는 정말로 **'이게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늘은 이들에게 당장 죽어라!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이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1996년도 Wacken Open Air가 모두 끝나고 토마스 옌센과 홀거 휘브너에게 진짜 한줄기의 빛이 되어준 그리고 희망이라는 것이 남아 있구나라는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다음편에 계속

낡은 중고차를 타고 독일 전역을 홍보하러 다녔던 토마스 옌센(좌)과 홀거 휘브너(우)

Wacken Open Air 1996 라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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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을 계속 매달리게한 또 다른 동기는 무엇이었을까요? 메탈에 미쳐있는 것 만으로는 설명이 되지가 않네요..^^;; 읽기로는 본편까지 수년간 금전적 성공은 없었다는 것 같은데, 정말 대단하다는 말 밖에는.. | ||
토마스 옌센이 했던 말을 고스란히 인용하면 “We did it because we loved metal.” | |||
그것만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그 이유 말고는 정말로 설명할 수가 없기는 한 것 같습니다 ㅎㅎ | |||
메킹에는 좋아요가 없는게 아쉽네요 베스트 게시물로 참 좋을텐데 말이죠 | ||
정말 파란만장한 삶이네요.. | ||
험난하기 그지 없는 스토리군요. 진정 불굴의 의지.. 그나저나 끊는 타이밍이 예술이군요. 다음편..다음편!!! | ||
다음 편이 궁금해지네요...얼른 연재해주세요~!!! | ||
이렇게 막대한 빚과 역경을 이겨내고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는게 대단하네요. 96년부터는 이제 라인업에 친숙한 이름들이 보이네요. | ||
역시 레전드는 역경 속에서 탄생하는 법이군요. 멋진 이야기 잘 읽고있습니다. | ||
잠시 스포를 하자면 Wacken이 지상 최대 메탈 페스트가 된 것은 이 둘의 노력도 노력이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 |||
좌절없는 성공은 없다 라는걸 다시 한 번 느끼게 해주네요... 좋아요 구독 버튼 어디있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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